天命之謂性 7
천명지위성
"지악필비," 즉 지극한 음악의 경지에서 비장감을 느낄 줄 아는 인간이라면 도덕적 품성이 나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인간은 "반선복시反善復始"하게 마련이라고 자사는 말한다. 그 본래적인 성의 좋음으로 돌아가고, 그 원초적 본바탕으로 복귀하게 된다는 것이다. "반선복시反善復始"는 동시에 음악의 멜로디의 구성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만큼 얘기했으면, 독자들은 『중용』 사상의 핵심과 『성자명출』의 패러다임의 상호연관을 충분히 파악했을 것이며 『중용』과 『악기』, 『성자명출』의 악론과의 내면적 상관성을 이해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중용』 제1장에서 앞의 2구 이후에 왜 갑자기 "희노애락"의 문제가 튀어나오게 되는지 그 필연적 관계도 용이하게 파악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자사는 성을 그토록 정과 관련시켜서 논의하는 것일까? 사실 이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면 우리는 『중용』의 전체적 의의를 파악할 길이 없어진다. 문제는 우리의 21세기 언어가 이미 인도유러피안언어의 세뇌를 거친 송유들의 왜곡을 한 번 거쳤고 또 20세기에 서양언어에 의하여 같은 방향으로 극심한 굴절을 겪었기 때문인 것이다. 일례를 들면, 칸트가 말하는 "감성→오성→순수이성→실천이성"이라는 도식에 암암리 우리는 감성을 저차원적인 것으로 보고, 이성을 고차원적인 것으로 바라보도록 세뇌당한다. 그런데 과연 인간의 인식능력 중에서 감성과 이성의 고저를 말할 수 있을까? "감성+오성+이성"의 문제는 순차적으로 작용하거나 일렬로 나열할 수 있는 인식기능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은 순간에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사태에 대한 칸트의 언어적 분석일 뿐이다. 인간의 인식순서가 칸트의 언어적 분석의 순서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지금 자사, 혹은 선진사상가들이 말하는 정이라는 것은 순수이성비판에서 전제된 원초적 감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인식능력에 있어서 감각자료의 수용을 의미하는 매우 수동적인 성격의 것이다. 선진사상가들이 말하는 "정"이라는 것은 완성된 인식을 넘어서는 것이며, 칸트가 말하는 순수이성과 실천이성과 심미적 판단을 다 포괄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책을 읽는다는 행위를 거시적으로 생각해보자! 내가 책을 읽을 때 나는 눈을 통해 문자를 해독하는 행위를 한다. 그 행위과정에는 물론 칸트가 말하는 감성과 오성의 결합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나의 의식세계에 그 책의 문자를 옮겨놓은 표상의 과정이다. 이 사유의 단계에서는 "A는 A일 뿐이다." 그러나 내가 A를 A라고 판단하는 과정에는 그 명제를 내가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 하는 매우 적극적이고도 능동적인 선택의 과정이 개입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판단된 명제를 내가 좋아할 것인가, 싫어할 것인가는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호오의 문제는 고도의 언어적 이성작용을 거친 후의 사태이며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것과 같은 호오가 아니다. 이 최후적 사태라는 것은 순수이성의 영역과 실천이성의 영역과 판단력의 영역이 구분없이 융합되는 것이다.
한 여자가 한 남자와 선을 본다고 해보자. 중매자들의 노력에 의하여 양측의 모든 조건이 최상으로 구비되었다. 다시 말해서 순수이성의 영역에서 따져볼 수 있는 모든 인과관계가 완벽한 진리치를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토록 완벽한 합리적 상대를 그 여자가 거부하는 사오항은 비일비재하다. 그 여자의 최종적 메시지는 매우 단순하다: "나는 저 남자가 싫다." 호오야말로 인간 존재의 최후 상황인 것이다.
자사상의 맥락을 이어받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회남자』의 '무칭'편에 다음과 같은 명언이 있다.
情繫於中, 行形於外, 凡行戴情, 雖過無㤪; 不戴其情, 雖忠來惡.
정계어증, 행형어외, 범행대정, 수과무원; 부대기정, 수충래악.
인간의 정이라는 것은 인간의 의식 내면에 묶여 있는 것이라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과 관련된 인간의 행동은 겉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인간의 행동이 내면적 진정을 담고 있을 때는 그 행동이 비록 과격해도 원망을 자아
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행동이 진정을 결여하고 있을 때는 비록 그 행동이 충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인 양 보일지라도 혐의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제 여러분들은 그 여자가 훌륭한 남자를 선보고 왜 비토를 놓게 되었는지를 가늠할 수가 있을 것이다. 다음 구절을 더 살펴보자. 오늘날 , 우리나라의 정치패턴에 대해 일격을 가하는 명언이라 할 수 있다.
心之精者, 可以神化, 而不可以導人. ... 故舜不降席而天下治, ...
인간의 마음의 정일한 경지는 신묘한 기운으로써 타인들이 스스로 변화되게 만들 수는 있지만,
그것을 말로 표현하여 타인을 계도할 길은 없다. ... 그러므로 순 임금은 옥좌에 가맘히 앉아만
있어도 천하가 잘 다스려졌고, 걸 임금은 계단을 미처 내려오기도 전에 천하는 개판이 되었다.
대저 진정이라는 것은 말로 위세를 떠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진정성이
없으면서 그것을 타인에게 요구한다는 것은 고금 이래 들어본 적이 없다. 지도자가 보통사람들이
쓰는 보통사람들이 쓰는 똑같은 언어로 말을 해도 백성들이 그것을 믿는 것은 그 믿음이 바로
언어 이전에 있기 때문이다. 성인이 위에 있기만 하여도 백성들의 마음이 움직여서 변화하는 것은
항상 성인의 진정이 그들 앞에서 이끌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도자가 위에서 지랄발광을 해도
백성이 콧방귀도 안 뀌는 것은 그 진정성과 정책명령이 따로 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역』에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항룡에게는 후회할 일만 남아있다."
얼마나 적확하고 명료하고 거대한 담론인가! 사대강 정비사업을 아무리 이성적으로 설득시킨다 한들, 그 이성적 언어 이전의 전정성, 과연 그 진의, 진정이 무엇인지가 전달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오직 후회할 일만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가 바로 근대이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칸트는 인간의 도덕을 순수이성을 넘어서는 차원에서 "요청"이라는 방식을 통해 규범적으로 deontologically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성적 해결방식이다. 그는 종교문제도 이성적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그 철저한 이성에 대한 신념은 패복佩服할 만하지만, 그러한 이론은 정을 통한 성의 수련이라는 측면에서는 전혀 기능성이 없다. 정의 수련을 통한 인간도 덕의 확보가 서양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도덕의 근원이 모두 초월자, 즉 신화적 세계에 뿌리박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칸트의 실천이성도 일차적으로는 "신의 존재"와 관련된 것이지, 순수한 인세의 도덕적 정감의 형성이 아니다. 자사와 같은 사상가의 노력에 의하여 우리는 이미 수천 년에 걸쳐 정의 윤리를 사회적 의식형태로서 축적해왔다. 이 동방사회의 장점을 버리고 이제 와서 천박한 서구의 이성주의로 회귀한다는 것은 철학적 사유의 유아적 오류를 반복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중용』을 21세기의 새로운 철학으로서 인식해야만 하는 소이연所而然이 있는 것이다. 나 도올은 말한다. 인간세가 추구해야 할 목표는 진리가 아니라 진정이다. 진정이란 진리를 통섭하는 것이다.
이제 다시 한 번 『중용』의 첫 구절을 한 번 개괄해보자!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우리는 "천명지위성"에 대하여 너무도 많은 말을 하였지만, "천명지위성"은 그 말 그대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최초의 입장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자 한다. "천명지위성"이라는 명제는 문자 그대로, "천이 명하는 것, 그것을 일컬어 성이라 한다"라는 호상적 규정 이외의 어떠한 선입견도 배제되어야 한다. 성은 천이 명하는 것이라는 규정성은 실제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바로 그 규정되지 않은 듯한 규정성이야말로 이 명제의 궁극적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개념의 외연이나 내연이 모두 개방적이라는 그 사실이야말로 앞으로 『중용』을 영원히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근거이다.
촘스키(Noam Chomsky, 1928~)는 인간의 언어능력의 후천적으로만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선천적인 어떤 구조를 타고난다고 보았다. 문자 그대로 백지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컴퓨터를 살 때에 아무런 프로그램도 입력이 되지 않은 컴퓨터이지만 입력을 시키면 입력이 의미있게 작동될 수 있는 물리적 구조가 이미 장착되어 있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키너(B. F. Skinner, 1904~90)와 같은 사람들의 행동주의 심리학은 그러한 물리적 구조 자체도 후천적인 학습에 의하여 형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낟. 조건반사와 같은 반응체계가 강화reinforcement에 의하여 고도의 구성력을 과시해 나간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촘스키는 너무도 짧은 시간에 대부분의 어린아이가 모국어를 마스터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만큼의 구성력을 과시하기에는 너무도 자극이 빈곤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내장되어 있는 언어구성능력이란 무엇일까? 그것이 DNA의 구조식에 의하여 결정되어 있는 것일까? 촘스키는 그 능력을 보편문법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의 생성문법의 모든 규칙에 가해지는 최소한의 보편적인 제약 같은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 제멋대로의 생성을 못하게 하는 최소한의 제약성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현재 아무도 말할 수가 없다. 다양한 언어의 깊은 연구를 해보면 그 보편성에 벗어나는 특례가 계속 발전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도 결국 『중용』의 논리에 집어넣어 보면 촘스키와 스키너 어느 한 편의 입장을 취할 필요는 없어진다. 성 그 자체가 천의 명에 의하여 진행되는 과정이므로 언어능력도 자연과 문명의 양자 사이에서, 즉 본능과 학습의 양자 사이에서 복합적으로 구성되어가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성은 자연이며 교는 문명이다. 그 사이에 도가 위치하고 있다. 이제 이 단의 본문에 주희의 해석을 엿보기로 하자!
"명"이란 명령한다는 뜻과 같다. "성"은 곧 리理이다. 천의 음양과 오행으로써 만물을 생성하고 변화시키나, 그 상황에서 가는 형체를 형성시키고 리는 또 한 그 가운데 품부되니, 명령이 하달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사람과 기타 자연 사물이 생겨남에, 각기 자기에게 부여되는 리를 획득하게 됨으로 인하여 하늘다운 건, 땅다운 순, 인간다운 우상의 덕을 형성하게 되었으니, 이것을 이른바 "성"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솔"이라는 것은 따른다는 뜻이다. "도"는 길과도 같다, 인과 물이 각기 그 성의 스스로 그러함을 따르게 되면 일용사물의 사이에서 각기 마땅히 행해야 할 길이 있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을 이른바 일컬어 "도"라 하는 것이다. "수"는 품절한다는 뜻이다(품격에 따라 절도있게 행한다). 성과 도가 결국 같은 것일 수는 있으나, 기품에는 혹 차이가 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불급의 차이가 없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성인께서는 인과 물이 당연히 행해야 할 바를 인하여 품절하여 천하에 법이 되게 하시니, 그것을 일컬어 "교"라 하는 것이다. 예·악·형·정과 같은 것이 모두 이 교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대저 사람이 자기에게 성이 구유되어 있다는 것은 알아도 그것이 천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성인의 가르침이 있다는 것은 알아도 그것이 나에게 고유한 바를 따라서 적절히 품절된 것이라는 것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사께서 여기에 첫머리에 이런 사실을 밝히셨으니, 동중서가 도의 큰 근원이 천에서 나왔다고 말한 것도 또한 이러한 뜻이라 할 것이다.
마지막 부분의 "蓋人知己之有性개인지기지유성" 이하는 송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있다. 송본이 『대전』본보다 더 우수하다. "동중서운운"한 것은 후대의 삽입 같다.
대저 사람이 사람된 까닭, 도가 도된 까닭, 성인이 가르침을 행한 까닭이 모두 그 유래된
바를 캐들어가면 어느 하나도 하늘에 근본하고 나에게 구비되지 아니 한 것이 없다. 배우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 배움에 있어서 힘써야 할 바를 알고 스스로 멈출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자사께서는 이것을 첫머리에 밝혀 놓으신 것이다. 독자는 마땅히 이것을
깊게 체득하고 묵묵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독자는 이제 나 도올의 주석과 주희의 주석을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확연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주희의 입장은 12세기 도학의 입장이다. 우선 그는 성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지 아니 하고, 당연히 있어야 할 모습으로 본다. 성은 도덕적 당위를 포함한다. 그것이 바로 하늘의 "명령"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명령의 내용이 "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이미 "성즉리"라는 도학의 대전제가 확연히 제출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이들 송유의 입장을 성리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성을 "인성"에 국한시키지 않고 "물성"에까지 확대시키고 있다. 대체적으로 주희의 "물"은 유기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도"는 "순리"의 길이 된다. 그리고 "수도"의 "수"는 성인이 인간의 기품에 따라 품절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수도"의 "수"는 성인이 인간의 기품에 따라 품절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수도"의 주체가 성인이 된다. 그러므로 "교"는 성인의 가르침이 되고, 에약형정으로 귀결된다. 인간의 개별적 주체성이 배제되고 있는 듯한 내음새를 풍긴다. 지금 21세기의 감각으로 보자면 대체적으로 밥맛없는 해석이라 할 것이다. 논리전개가 너무 지나체게 연역적이다.
'사가지 있는 인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용 제1장 1-4 희노애락지미발, 위지중; 발이개중절 위지화. 중야자, 천하지대본야; 화야자, 천하달도야. (0) | 2019.01.22 |
---|---|
중용 제1장 1-2 도야자, 불가수유리야. 가리, 비도야. 시고군자계신 호기소불도, 공구호기소불문. (0) | 2019.01.21 |
중용 제1장 천명지위성 6 (1) | 2019.01.20 |
중용 제1장 천명지위성 5 (0) | 2019.01.18 |
중용 제1장 천명지위성 4 (0) | 2019.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