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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지 있는 인문학

중용 제1장 천명지위성 5

天命之謂性 5

천명지위성


"희노애비지기喜怒哀悲之其, 성야性也"라는 말은 반드시 다음에 오는 "급기현어외 及其見於外 즉물취지야則物取之也"라는 말과 짝을 지어서만 의미를 갖는다. 희노애비의 기의 가능성이 모두 함장되어 있는 것이 성이기는 하지만, 그 성이 외부로 발현되어 드러나는 것은 반드시 물과의 접촉을 통하여 촉발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대상세계와의 교섭을 통하여 방향이 일정치 않았던 심적 현상(心無定志)이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구체적인 감정표현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은 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性自命出), 그 명은 천으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다(命自天降). 여기 "명자천강"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상서』나 『시경』에서 수없이 발견할 수 있는 초월적·주재적 천의 이미지를 보지保持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 논의되고 있는 앞뒤 맥락을 따져보면 그것은 성과 물의 교섭관계 mutual prehension라는 컨텍스트에서 이탈되지 않는다. 성은 명으로부터 나오며, 명은 하늘로부터 내려온다라는 것은 결국 성을 자극시켜 감정의 방향성을 결정지우는 명령이 끊임없이 하늘, 즉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총체적 환경, 다시 말해서 현대철학에서 말하는 생활세계Lebenswelt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이 생활세계란 여기서는 서양현대철학 개념과는 달리 자연과학이 대상으로 하는 이법적 ·물리적 자연까지도 포섭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자명출』의 이 두 문구를 합치면 곧 『중용』의 천명지위성이 된다.


                                              성자명출 + 명자천강 = 천명지위성

                                               性自命出   命自天降    天命之謂性


그리고 바로 연이어 "도시어정道始於情, 정생어정情生於情"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데 이것은 『중용』에서 "천명지위성" 다음에 바로 "솔성지위도"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것과 궤적을 같이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성과 도의 문제를 논리적으로 연결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그에 연이어 "시자근정始者近情, 종자근의終者近義"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데, 이것은 전후 맥락으로 볼 때 『중용』의 제3구인 "수도지위교修道之謂"의 실제 내용을 규정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기실 "성자명출"로부터 시작되는 세 문장은 『중용』의 첫 세 문장과 병렬되는 성질의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다음의 도표를 보라!


 

 『성자명출性自命出』

 『중용中庸

 제1구

 성자명출, 명자천강

 性自命出  命自天降

천명지위성

天命之謂性 

 제2구

 도시어정, 정생어성

 道始於情  情生於性

솔성지위도

率性之謂道 

 제3구

시자근정, 종자근의 

始者近情  終者近義 

수도지위교

修道之謂敎 


이제 우리는 제2구로부터 해석을 해야 한다. 어떻게 『성자명출』의 제2구와 『중용』의 제2구가 필연적 관계를 갖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여기서 우선 "도"라는 것은 『노자』에서 보여지는 것과도 같은 어떤 인간의 삶, 특히 인간의 언어의 국하넛응ㄹ 벗어나는 우주론적 이법 Cosmological Law을 의미하기보다는 매우 소박한 "삶의 길 the Way of Life"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이든(나는 『중용』의 논의를 인간에게 구속시키지 않는다) 자연이든, 어떠한 유기체이든지간에 그 유기체가 살아가는 그 지속성에는 반드시 그 방식, 즉 길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성자명출』에서나 『중용』에서나 그 길의 최대의 관건은 어떻게 정의 발출을 다스리는가의 문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길"이라는 것은 "성"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道始於情). 그런데 이 "정"이라는 것은 "성"으로부터 생겨나는 지향성이다(情生於情). 따라서 『중용』의 "솔성지위도"도 반드시 "성→정→도"라는 논리적 필연성의 맥락 속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솔성"의 문제는 결국 "솔정"의 문제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정·주희를 비롯한 송유들은 천명을 하늘의 초우러적 도덕적 근원으로 보고 그것을 받은 인간의 성을 순결한 도덕적 본성, 즉 인간존재의 선천적 순선의 코아로 파악했기 때문에, 그것은 이어받은 제2구의 "솔성"이라는 것은 아주 자동적으로 그냥 그 "도덕적본성을 충실히 따르는 행위"가 되고 만다. "솔"은 맹목적 순종이라는 의미에서의 "순"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성"에 그러한 규정성이 없어지게 되면, 더구나 "성"이 희노애비의 기가 되어버리고 말게 되면, 맹목적 "솔성"이라는 것은 위험한 행위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솔"에는 반드시 "선택"이라고 하는 의지적 요소가 가미되지 않을 수 없다. 그 선택이란 바로 정의 지향성의 선택이 되는 것이다. 천과의 끊임없는 교섭의 프로세스에서 성의 발현을 올바르게 선택하는 것, 그 선택의 행위가 바로 "솔성"이 된다. "길"이라는 것은 반드시 선택하는 것이다. 삶에는, "길"은 다 보이지 않지만 무한한 변수의 길이 존재한다. 우리가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솔성"이 바로 "길"이 되는 것이다(率性之謂道). 이 길은 정에서 시작되었고, 이 정은 성에서 생겨난 것이다(道始於情, 情生於性). 인간의 삶의 역사는 바로 이 길을 선택하여 문명의 길을 구축해간 자취이다. 그러나 실상 문명의 단계를 반드시 전제하지 않아도, 모든 생물·무생물의 역사가 그 길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장자』「천운」편의 이와 같은 한마디는 『성자명출』의 논지를 지극히 정교하게 계승하고 있다: "聖也者성야자, 達於情而遂於命달어정이수어명. 성인의 경지라고 하는 것은 정에 달통하여, 그 천명을 완수하는 것이다."(沃案:북문성과 황제의 대화로서 나오고 있는 구절인데, 음악을 주제로 하고 있다. 그런데 『성자명출』에 있어서도 후반에는 악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장자』의 많은 구문이 『중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제3구를 논파해야 한다. 『성자명출』의 제3구인 "시자근정"은, 『중용』의 제3구가 제2구의 "도"를 물고 왔듯이, 같은 패턴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시자"의 숨은 주어도 "도"라는 것이다. 여기 "시자"와 "종자"라는 개념은 기나긴 시간의 추이를 전제로 하고 있다. 시와 종은 그것 자체로의 두 시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이라는 개념으로 해서 형성되는 과정 즉 프로세스를 말한다. 장단이 길음과 짧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형성하는 리듬이라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시와 종의 프로세스는 도의 프로세스이며, 그것이 곧 『중용』 제3구의 "수도"에 해당된다. 제2구에서 말했듯이 길이란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선택된 길이란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갈고 닦아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잘 만든 길이라 할지라도 끊임없는 관리와 보수를 하지 않으면 곧 가시덤불이나 진흙 속에 묻히고 만다. 길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닦아야 하는 프로세스라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수"하지 않아도 되는 "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도"는 영원히 "수도"의 대상이다. 이 "수도"를 "교"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것을 현재 우리가 "교육"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확고하게 자연의 영역이 아닌 문명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본능Nature의 영역이 아닌 양육Nurture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무위의 영역이 아닌 유위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존재의 영역이 아닌 당위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자명출』은 이 『중용』의 제3구에 대한 중대한 내용적 규정을 하고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도의 출발은 정에 가깝다는 것이다. 정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개체적 의식의 범주 속에 머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지향성을 갖느냐에 따라 그 가치는 임의적이고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따라서 그 "수도"의 거시적 방향성은 개체의 임의성을 초극하는 사회성을 획득해야 한다. 그것을 "의"라고 표현하고 있다. 도의 출발은 정에 가깝지만, 도의 완성은 의에 가까워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수도"의 종착역에는 사회정의의 구현이라는 목표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사회정의란 유가에서는 "대동"을 구현하는 것이다. "대동"의 구현이란 바로 인간의 정이 사적인 이해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대동"에 관한 기술은 거의 『성자명출』과 동시대에 성립한 것으로 간주되는 『공자가어』「예운」편에 잘 묘사되어 있다. 사적인 이해영역을 벗어난다는 것은 이와 같이 표현한다: "사람들이 자기 양친만을 양친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 자식만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리고 또 이와 같이 말한다: "홀아비나 과부나 돌보는 이 없는 고독한 어린아이나 질병에 시달리는 이들이 모두 잘 양육되는 사회!" 이것은 존 롤즈 John Rawls, 1921~2002가 말하는 "최소극대화원리"에 해당되는 것이다. "종자근의"를 「예운」은 이와 같이 표현한다: "대도가 행하여지면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사적인 기준을 버리고 공적인 기준에 의하여 행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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