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 1-4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達道也.
희노애락지미발, 위지중; 발이개중절, 위지화. 중야자, 천하지대본야; 화야자, 천하달도야.
1-4 희노애락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상태를 중이라 일컫고, 그것이 발현되어 상황의 절도에 들어맞는 것을 화라고 일컫는다. 중이라는 것은 천하의큰 근본이요, 화라는 것은 천하사람들이 달성해야만 할 길이다.
沃案 『순자』의 「정명」편에도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성의 호오희노애락을 일컬어 정이라 한다." 매우 짤막한 한 구절이지만 『성자명출』에서 확연히 표명된 자사의 사상을 적통으로 잇고 있는 발언이라고 할 것이다. 성은 본래 모든 정의 가능성이다. 성과 정을 지나치게 이원화하는 논리는 모두 『중용』에 대한 바른 이해라고 말할 수 없다. 이 구절도 학문적으로 탐구해 들어가자면 한우충동하는 문헌이 동원될 수 있을 것이나, 아주 단순하게 이해하는 것이 상책이다. 희노애락이라는 감정이 구체적인 지향성을 가지고 그 나름대로 아이덴티티를 지니고 발현·발전되기 이전의 상태, 그것은 무감정의 상태가 아니라, 모든 감정이 동적 평형을 이루고 있는 상태라 말해야 할 것이다. "중"을 도덕적 행위, 그 도덕성의 조화태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심적 에너지의 원초성으로 말하는 데 자사사상의 위대성이 있다. 그런데 중의 상태에 있는 감정은 반드시 발현되기 마련이다. 인간은 무분별의 경질써만은 살 수가 없다. 인간이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분별의 과정"이며, "분별의 예지의 습득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분별의 예지"를 "이성"으로 말하지 아니 하고 "감정"으로 말한다는 데 자사 사상의 특색이 있다. 위에서 인용한 순자의 문장에 뒤이어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정의 세계가 펼쳐져 있는 그 상태에서 심이 적절한 판단을 내려 선택하는 것이 사려이다." 다시 말해서 이성적 사려라는 것도 정과의 관련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다.
모든 분별적 삶의 상황은 시시각각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때 우리의 감정은 필연적으로 발현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감정의 발현은 발현되는 방식이 있다. 그 방식이 반드시 주어진 상황의 절도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장례를 당하여 깔깔 웃을 수는 없는 노릇이요, 친구아이 돌잔치에 가서 엉엉 울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매우 미묘한 일상적 감정의 사태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중절中節"의 문제는 항상 과제상황으로 등장한다. 우리가 "상황situation"이라는 말을 "정황情況"이라고 부르는 것도 얼마나 동방인들이 정情을 중심으로 삶의 상황을 생각했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중절"의 "중"은 "위지중"의 "중"과 다른 용법이다. 동사로서 제4성으로 읽어야 한다. 우리말의 "적중한다"는 뜻과 같다. 그렇다고 『중용』의 논리를 서구윤리학에서 말하는 "상황윤리"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서구의 상황윤리는 너무 지나치게 개인의 공리주의적 계산에 의한 상대성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고정된 가치규범을 거부한다는 맥락에서는 『중용』의 논리와 상통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이 단에는 "천하"라는 말이 쓰이고 다음 단에는 "천지"라는 말이 나온다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천하"는 인간세의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화"를 "달도"로 규정했는데, 이를 "보편적인 도" "공통된 도"라고 번역하는 것은 너무 "달도"의 의미를 좁게 해석하는 것이다. 그것은 주희의 체용론에 의한 설명방식에 영향을 받은 것이나, 그러한 번역은 인간의 윤리적 노력, 즉 "하학이상달"하는 "달성의 프로세스," 그 삶의 다이내미즘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세의 "화"라고 하는 것은 보편적 현실태가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항상 "불화"하 것이다. 따라서 "화"라는 것은 "달성되어야만 할 이상"이다. 그것을 향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우리 인간문명의 프로세스인 것이다. "달도"를 "보편적인 도"라고 번역하면 이러한 다이내미즘을 유실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달성되어야 할 도"일 뿐이다. 동방사상을 단순히 "조화사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평면적인 이해에 불과하다. 인간과 인간세의 부조리와 불화에 대한 심각한 체험을 바탕으로 "조화"를 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달도"라고 말한 것이다. 조선 말기의 유의인 이제만李濟馬, 1837~1900 『중용』의 희노애락에 의하여 인간의 체질을 분류하는 재미있는 발상을 하였다. 체질과 장기와 성정의 유기적 관계를 논한 것이다. 예를 들면 태양인은 애성이 원산하고 노정이 촉급한 성향이 있다. 그런데 애성이 원산하면 기가 폐로 흘러들어가 폐를 왕성하게 하고, 노정이 촉급하면 기가 간을 격발시켜 간을 약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정의 경향성 때문에 폐대간소의 장국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사상 성정론 장기의 형국
태양인 희 성 달수 감폐 폐대간소
태양인 애 정 촉급 삭간 비신대소
소양인 애 성 촉급 삭간 비대신소
...
매우 복잡하고 중측적이고 도식적인 논의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성정을 체질과 관련시키고 또 그것을 만물의 약성과 관련시켜서, 체질별로 투약의 특성의 근거를 마련한 것은, 자사의 성정론이 단지 형이상학적 논의가 아니라 인간을 현실적으로 치료하는 의학의 근거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며, 또 정론이 동아시아문명권 내에서 얼마나 보편적인 주제인가를 역설적으로 논증하고 있다. 우주만물의 성정과 인간의 통합적으로, 상응적으로 파악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마는 성을 정을 떠나서 생각하지 않았다. 성은 느긋하고 정은 촉급한 것일 뿐이다. 이제마의 논의의 진위여부를 떠나서, 나 자신 임상을 경험한 의사로서, 상당히 경험적으로 설득력있는 도식이라는 것만 말해두겠다.
주희장구 : "樂"은 "락"이라고 발음한다. "중절"의 "중"은 거성이다. 희노애락은 정이다. 그것은 아직 발현되지 않은 상태가 곧 성이다. 편벽되고 치우친 바가 없으므로 그것을 일컬어 중이라고 한다. 발현하여 모두 절도에 들어맞는 것은 정의 바름이다. 괴려가 없으니 그것을 일컬어 화라고 한다. 발현하여 모두 절도에 들어맞는 것은 정의 바름이다. 괴려가 없으니 그것을 일컬어 화라고 한다. "대본"이라고 하는 것은 천명의 성이니, 천하의 리가 모두 어기서 나온다. 도의 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달도"라고 하는 것은 성을 따르는 것을 일컫는 것인데, 천하사람들이 예로부터 지금까지 모두 공유하는 바이므로 그것은 도의 용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 단은 성과 정의 덕을 말함으로써 도가 우리에게서 떠날 수 없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장구옥안:주희는 정과 성을 현상과 본체라는 틀 속에서 보지 않을 수 없도록 이미 그의 사유를 구조 지워 놓았다. 따라서 대본과 달도도 도체와 도용의 문제로 분류하여 규정할 수밖에 없다. 도체는 성의 덕이 되고, 도용은 정의 덕이 된다. 나는 이런 시각을 취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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