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 1-2. 道也者, 不可須㬰離也. 可離, 非道也. 是故君子戒愼 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도야자, 불가수유리야. 가리, 비도야. 시고군자계신 호기소불도, 공구호기소불문
1-2. 도라는 것은 잠시라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도가 만약 떠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보이지 않는 데서 계신하고, 들리지 않는 데서 공구한다.
자사는 성·도·교중에서 가운데의 도를 끄집어내어 다음의 논리 전개의 주제로 삼고 있다. 이것은 매우 현명한 전략이다. 도를 말하면 결국 성과 교를 모두 포섭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성과 밀착되어 있는 도는 나라는 존재의 내부의 문제이므로 잠시라도 나에게서 떠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나의 존재성을 규정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나, 희교도도들 잠시라도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잠시라도 떠날 수 없는 존재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원초적 의미에 있어서 야훼가 되었든, 알라가 되었든 나 존재 밖의 타자이다. 신앙을 망각하면 그것은 나에게서 떠나 있다. 그러나 도는 나에게서 타자가 아니다. 그것은 나 이외의 어떠한 인격적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일용지간에 철저히 나의 몸에 내재하는 것이다. 내가 밥을 먹을 때도 밥을 먹는 도가 있다. 잘 때도 자는 도가 있다. 생각할 때도 생각하는 도가 있다. 말할 때도 말하는 도가 있다. 차를 마실 때도 차를 마시는 도가 있다. 성교를 할 때도 성교를 하는 도가 있다. 숨을 쉴때도 숨을 쉬는 도가 있다. 걸을 때도 걷는 도가 있다. 정치에 참여할 때도 정치에 참여하는 도가 있다. 이 모든 도가 잠시라도 나에게서 떠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나의 부단한 일상적 노력을 강조하는 논리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도를 닦는 삶의 자세는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세보다 더 부단한 노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하나님을 내 몸 속에 구현하는 과정이다. 신앙은 대상을 갖지만 도는 대상을 갖지 아니한다. 그것은 존재의 방식이며, 몸의 방식이다. 하나님의 관념이 아닌 실제이며, 그것은 몸의 구체성일 뿐이다.
"부도"와 "불문"은 "보지 않는다" "듣지 않는다"로 번역될 수 없다. 그것은 수동형이다. 한문에는 수동형이 한자 한 글자 자체의 성격에서 주어진다. 만약 "보지 않는다" "듣지 않는다"의 의미였다면 "불시" "불청"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부도" "불문"은 미발의 상태의 "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소박한 "홀로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잠시라도 떠날 수 없는 도를 닦는다는 것은 남들이 보든 말든, 듣든 말든 나 홀로 항상 계신하면 두려움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중용"이란 내 존재의 내면의 심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리"는 거성이다. 도라고 하는 것은 일용사물에 있으서 마땅히 행해야 할 리이니, 모두 성의 덕으로서 마음에 구비되어 있기 때문에 물마다 이를 가지고 있지 아니 함이 없고, 시마다 그러하지 아니 함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잠시라도 떠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만약 떠날 수 있다면 어찌 "솔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이 부분이 송본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만약 떠날 수 있다면 그것은 바깥 사물이 되어버리므로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의 마음은 항상 경외감을 보존하여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데서도 감히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천리의 본래 모습을 보존하여 잠시의 순간이라도 도가 나를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주희는 도를 말함에 있어 "천리의 본연"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도덕적 긴장의 근거이다. 인욕이 개재되어 존재의 원초적 통일성을 파괴하여 인간과 도를 분리된 이물로 만들어버리는 위험성을 경계하고 있다.
1-3 숨은 것처럼 잘 드러나는 것은 없으며, 미세한 것처럼 잘 나타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 있음을 삼가는 것이다.
마태복음 10:26~27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옥상 위에서 선포하라.'
그리고 같은 내용의 파편이지만 다른 전승의 것으로 보이는 구절이 누가복음 12:2~3에 나타난다. 따라서 이 자료는 『Q복음서』에 속하는 것이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것이 옥상 위에서 선포되리라.
형식상 누가복음의 파편이 보다 일관되고 이해가 쉽다. 많은 학자들이 누가쪽이 더 오리지날에 가깝다고 말하지만 그 정답을 가리기는 어렵다. 누가자료는 1절에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회식을 주의하라"라는 말이 있다(누룩은 위선적 행동이 은근하게 타인에게 미치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기 땜누에 그 전체적인 맥락으로 보면, 드러나지 않게 숨기고, 어두운 데서 골방에서 속삭인 위선적인 내용이란 결국은 폭로되고 말 것이라는 부정적인 뜻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이 종말론적 맥락에 놓이게 되면, 마지막 심판의 날에는 인간들이 비밀스럽게 숨겨온 모든 것들이 폭로되고 알려질 것이라는 경고를 담고 있다. 불트만은 『공관복음전승사』에서 이 말은 민간속담의 한 형태가 전승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마태는 좀 맥락이 다르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은밀하게 어두운 데서 일러주고, 귓속말로 속삭인 것을 위기의 상황에서 당당하게 옥상에서 선포하라는 권고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감추인 것" "숨은 것"이 반드시 부정적 함의를 지는 것으로만 해석할 필요가 없다.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의 "저희"는 예수와 제자들을 핍박하는 자들이다. 단순한 위선자들이 아니다. 매우 노골적으로 예루살렘 멸망을 앞둔 교회상황을 전제로 하고 만들어진 로기온자료라는 사실이 전후맥락으로 드러난다. 결국 이 담론의 맥락은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 하리라",(마 10:38)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읽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9)라는 두려움 없는 자기희생을 목표로 하고 있다. 따라서 마태의 맥락은 현재 "감추인 것처럼 보이는 것," "숨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 모두 천국의 모습으로 간주될 수가 있다. 지금 천국은 너희들에게 그토록 미세하고 은폐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언젠가는 영예롭게 그 찬란한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희망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중용』의 맥락에는 이런 종말론적인, 그리고 매우 전투적인 긴박한 상황이 개재되어 있지 않다. 누가에서는 명맥하게 "감추인 것"과 "숨은 것"이 부정적인 사태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중용』에서는 "숨은 것" "미세한 것"이 궁극적인 긍정가치로서 언급되고 있다. 숨음과 드러남, 미세함과 나타남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통섭되는 것이다. 숨음처럼 잘 드러남이 없고, 미세함처럼 잘 나타남이 없다. 따라서 구태여 드러날 필요가 없고 나타날 필요가 없다. 숨어있고, 미세한 곳에서 인간 본래 모습의 최대치를 발현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천명을 가장 바르게 드러내는 정도이다. 우리가 현대어에서 "은미"라는 말을 잘 쓰는데 이것이 『중용』에서 유래한 것이다. "은미함"이 곧 "홀로있음"이다. 인간의 고독은 인간의 축복이다. 인간은 고독 속에서 성장하고 하늘을 발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호롤 있을 때, 우주의 그 어느 누구도 나를 보지 않을 때, 은미한 디테일이 다 수도의 대상이 될 때, 그 때를 삼가야 하는 것이다. 삼가함은 신중함이다. 삼가함은 자기절제며, 자기 발견이며, 자기주체의 심화과정이다. 그것은 쉼이 없이 전개되는 주체의 심화과정이다. 겉으로 드러나고 나타나는 "나댐"의 과정이 아니라, 자기주체 내면으로 한없이 침잠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그 검은 바다 속 수천 미터 아래로 잠수해 내려가는 잠수부의 고독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이 "신독"이다. 이런 의미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윤리를 논구하면서 동방인들은 "미엔쯔"만을 밝히고 내면적 소명을 결하고 있다고 말한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인간의 문제를 완전히 전도된 형태로 파악한 것이다.
"신독"사상은 『주역』의 대과 괘의 상전에도 이런 말로 나타나고 있다: "군자는 위기의 상황에서 홀로 서도 두려움이 없으며, 세상을 등져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답답함이 없다. 그리고 『대학』에는 "성의"의 맥락에서 언급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뜻을 성실하게 한다" 즉 마음의 지향성을 바르게 갖는다는 것은 곧 스스로의 감정을 기만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악취를 싫어하듯 악을 미워하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듯 선을 사랑하는 그 진정성을 보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자겸"이라 불렀다. 『대학』에서는 일차적으로 "신기독"의 의미를 "홀로 있을 때의 감정을 신중히 한다"는 뜻으로 풀었다. 『중용』의 신독사상이 훨씬 더 포괄적인 존재론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신독"은 개인의 내면적 사태이므로 사회적 결과에 의하여 선악을 판단하는 일체의 공리주의적 윤리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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