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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지 있는 인문학

중용 제1장 천명지위성 2

天命知謂性 2

천명지위성 2



여기 우선 "명"이라는 동사는 고전중국어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시제가 규정되어 있질 않다. 그러나 시제가 규정되어 있질 않다는 그 사실로부터 우리는 그 의미를 추론해야지 그것을 시제가 확실한 인도·유러피안 언어적 발상에 의하여 규정하면 안된다. "천명"은 과거형일 수가 없다. 예를 들면, "하늘이 명해버린 것"이라고 번역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이 일 시점에서 명령되어 그 제작이 끝나버린 어떤 실체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성은 하늘이 명한 것이 아니라, 명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영원한 현재형이다. 영원한 현재형이라는 것은 성은 그 본질적 성격상 일시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형성중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성이란 하늘이 끊임없이 명령하면서 형성되어가는 것이다. 성은 고착적 존재가 아니라 창진적 생성이다. 이것은 내가 현대 철학적인 개념을 『중용』에 덮어씌워 하는 말이 아니다. 바로 이후에 나오는 『중용』의 성론의 언어에 의하여 정확하게 입증될 것이다. 


"명령"이라는 말은 초월적 존재자를 전제로 했을 때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자사의 의식세계에 오면 천은 그러한 고래의 함의를 결코 다 탈색해버리지는 않지만 그 초월적 함의는 다 사라지고 만다. 그렇다면 "명령"이란 존재자의 명령이 아니라, 천이라는 대자연의 우주생명과 개체와의 "교섭intercourse, interaction, mutual comprehension"을 의미한다. 하늘의 초월성, 자연성, 인문성이 모두 나와 교섭하는 것이다. 그러한 교섭중에 나는 형성되어가는 것이다. 하늘 그 자체가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초월적인 생성체인 것이다. 따라서 성선이다 성악이다 하는 규정성은 자사의 성과는 관련이 없다. 그것은 자사 이후의 일곡의 발전이다. 기실, 성선이나 성악이 모두 인간의 성에 대한 실체적 규정이 아니다. 성의 생성성生成性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순자도 인간의 성을 악하다고 규정한 적이 없다. 선의 반대는 불선일 뿐이며,"악"은 모두 "오"로 읽어야 마땅하다. 여기서 "악=오"이란 인간의 성이 악하다는 논리적 규정의 문제가 아니라 왜 인간이 아름답지 못한 "증오스러운, ""혐오스러운"행동을 하는가에 관한 반성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현실태에 관한 심미적 성찰일 뿐이다. 따라서 순자의 논의에 본질적인 것은 선·악의 윤리적 규정성이 아니라, "성위지분"이다. "성"이란 태어난 그대로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며, "위"란 예의지도에 의하여 만들어가는 후천적·인위적 학습과정이다. 물론 순자가 인간의 "성"의 상태에 욕망의 주체를 설정하여, 그것이 이목지욕耳目之欲이나 "호성색好聲色"에 의하여 지배된다고 보고 있기는 하지만, 홉스처럼 그렇게 지독하게 "만인의 만인에 대한 대적의 상태 the condition of where every man is enemy to every man"로서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위"에 의한 교정을 요구하는 수준에서 인간의 욕망의 자연스러운 발현을 전제하고 있을 뿐이다. "선"이라는 것은 굽은 나무를 교정목에 의하여 오랫동안 눌러놓고 찌고 하는 과정을 거쳐서 생겨난 "곧음"과도 같은 것이다. 성인의 존재이유가 바로 성을 화하기 위하여 위를 일으키기 위함이다(故聖人化性而起僞). 그러기 때문에 예의법도라는 것이 모두 성인의 위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인간의 성에 고유한 것이 아니다(非故生於 人之性也). 홉스가 인간의 자연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의 상태로 규정하는 것은 사실에 기초한 관찰이라기 보다는 사회계약을 도출하기 위한 방편적 가설heuristic device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순자의 자연상태에 성인의 위나 예의법도를 정당화하기 위한 인성의 사실적 한 측면을 지적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순자는 "악" 을 말한적이 없고, "오"만 말했으며, 선의 가능성은 이미 성에 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굽은 나무가 펴지는 것 또한 나무의 원래 성질 속에 포함되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성선·성악의 윤리적 이원론에 의하여 왈가왈부하는 것은, 20세기 서양언어에 의하여 왜곡된 동방번역 개념에 의한, 근원적으로 그릇된 논의일 뿐이다. 순자는 『중용』적 논리에 의하면 "교"의 절실한 필요성을 강조하고 싶었을 뿐이다. 서양인들이 근세에 와서 자연상태를 운운한 것은 모두 문명 특히 국가제도와의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운운한 것이다. 따라서 문명에 대한 긍정적시각을 가지고 있을 때는 자연상태는 대상 나쁜것이 된다. 탈출해서 문명의 치료 진입해야 할 난의 상태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문명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상가들에게 있어서는 자연상테는 매우 좋은 것이 되며 이상화된다. 오히려 이낙ㄴ의 목표는 문명을 탈출하여 자연으로 진입하는 것이 되며 이상화된다. 오히려 인간의 목표는 문명을 탈출하여 자연으로 진입하는 것이 된다. 후자의 경우 룻소와 노자가 비슷하다고 말할지 모르나, 그렇지 아니 하다. 노자는 룻소만큼 낭만적이지 않다. 노자에게 있어서 자연 즉 천지라는 것은 매우 불인한 것이다. 인간화되어 있는 이상성이 아니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자사의 『중용』을 운운한다면 우리가 깨달아야할 것은 선진사상가들은 결코 자연상태와 문명상태를 대적적인 관계로 파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제로섬게임의 관계가 아니라 상생상보적이 관계에 있다. 이러한 상생상보적 관계 속에서만 우리는 "천명지위성"을 논의해야 하는 것이다.


순자가 "성"을 "위"가 가해지기 이전의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규정한 것은 오히려 자사의 원의에 더 접근하는 것이다. 아마도 맹자와 논전을 벌인 고자의 입장도 순자와 마찬가지로 오히려 맹자의 스승인 자사의 포괄적 "성" 개념에 더 접근하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고자가 "생지위성"(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을 일컬어 성이라 한다)을 말하고 "식색지성"을 말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입장에 대해 맹자를 존숭하는 송유들을 매우 닭살을 돋아세우며 혐오감을 표명하고 이단적 시각을 설정하는 이유는 "성"을 인간의 도덕적 본질로서 특수가치화하고 싶은 갈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명에는 인간의 욕망이나 생긴 그대로의 모습, 즉 서양언어의 세뇌를 받은 그릇된 번역어인 "본능 本能instinct"과도 같은 개념지도에 의하여 잘못 설정되는 인성의 측면에 대한 극심한 혐오감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혐오감은 맹자에게서 비롯되는 측면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아주 유치한 기독교윤리의 영육적 이원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천이 명한다, 하늘이 명한다, 하나님이 명한다! 이것을 생긴 그대로의 본능이라고 규정한다면 천이나 하나님의 도덕적 실존가치가 다 상실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엘리야 선지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다. 그러나 그 음성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 야훼를 믿지 아니 하는 타 민족의 예언자들을 다 쳐 죽이라는 내용이다. 광야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세미한 신독의 소리가 결국 무자비하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들을 수백 수천 명이고 도륙하라는 메시지인 것이다.


『중용』에서 말하는 "하늘의 명령," "하나님의 명령"이 과연 이러한 내용일까? 우리는 항상 자연과의 교섭 속에서 산다.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항상 세미한 하느님의 메시지를 듣는다. 이것을 "본능"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런데 과연 본능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적"이 되는 전쟁상태를 의미하는 것일까? 식색의 본능"은 과연 그토록 사약한 것일까?


나 사람이든, 내 서재 창밖을 보이는 나무든, 모든 유기체는 식과 색을 떠날 수 없다. 식은 생존을 위함이요, 색인 재생reproduction을 위함이다. 그러나 자연상태에서는 오히려 식색이란 과·불급이 거의 없다. 나는 요즈음 집에서 닭을 키우고 있다. 닭은 확실히 식성이 좋지만 아무리 진수성찬을 베풀어도 필요한 양식 이외의 분량을 취하는 법이 없다. 과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색도 종족번식을 위한 생식 이외의 정의 낭비는 거의 없다. 연어도 그 기나긴 수년간의 생애의 여종 속에서 마지막 순간에 다 한 번 사정을 하고 죽는다. 인간처럼 매일 정액을 낭비하는 동물은 자연계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약육강식"이니 "정글의 법칙"이니 하는 따위의 개념도 가치론적으로 완벽하게 왜곡된 언어일 뿐이다. 정글의 세계에서도 "약육강식"이란, "식"에 대한 언어로서는 부적합하다. 사자나 소나 말을 잡아먹는 것은 우리가 밥을 먹는 것과 똑같은 "식"이다. 사자가 타 동물을 헌팅하여 먹잇감을 취득하는 성공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매우 저조하다(헌팅 시도빈수에 대하여 성공률은 10~20%밖에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먹이만을 취하는 것이다. 힘이 강하다고 해서 타종을 멸종시키는 사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호랑이도 배가 부르 때는 코앞에서 토끼가 얼쩡거려도 평화롭게 바라만 본다. 과욕이 없다. 그들이 오직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하여 공격성을 발휘할 경우, 그것은 가치판단적 공격성aggression에 해당되지 않는다.


내가 키운 수탉 한 마리가 병아리 시절부터 날갯짓을 하면 수직으로만 상승하는 기묘한 습성이 있어서, 이름을 "콥타"라 지었다(헬리코타의 준말). 그런데 이 콥타는 매우 식성이 좋다. 그래서 서재 앞에서 내가 맛있는 과자를 주면 병아리들이 우루루 몰려들어 먹는데 좌우전후를 불고하고 먼저 독차지 하다시피 먹고, 남의 것까지 가로채는 왕성한 습성이 있었다. 그런데 이 콥타가 몇 달만에 거대하고 의젓한 아름다운 색깔의 수탉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닭장 내의 모든 암컷을 제압하면서 질서감을 주었다. 이 수탉이 질서감을 부여하는 관건이 "울음"이다. 수탉의 울음은 권위를 상징한다. 그리고 울기 시작하면서 대체로 성행위를 시작한다. 그런데 성행위가 시작되면 암컷들과의 관계에서 어느 정도 호오의 관계가 생겨난다. 콥타와 같이 자라난 동기생 암컷 중에 너무 성장 템포가 느리고 사이즈가 작은 두마리가 있어서 이름을 "피노"와 "키오"라고 지었다. 그런데 이 피토와 키오는 작지만 단단하고 매력이 있었다. 성장해가면서 콥타는 피노와 키오와 친근감을 두텁게 했다. 이 두 마리와의 성교회수가 비교적 잦은 것이다. 그런데 어제 오랜만에 내 서재 앞마당에서 맛있는 과자를 주었다. 그런데 나는 놀랄만 한 사실을 목격했다.


과자를 쪼개어 땅에 떨어뜨리기 시작하자 콥타가 제일 먼저 왔다. 그런데 그토록 좌우불고하고 잘 먹던 콥타가 먹지를 않고 "꾹꾹꾹꾹"하는 특이한 소리로 암탉을 불렀다. 그러나 피노와 키오가 왔다. 그런데 타 암컷들은 접근 못하게 했다. 그리고 자기는 안 먹고 지키면서 피노와 키오가 배불리 먹도록 해주었다.


먹이를 먹지 않고 타에게 양보하는 사양의 미덕은 새끼를 부화시켜 양육하는 어미닭에게서 극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다. 이 경우는 약자를 보호하는 어미의 역할을 생존의 본능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콥타가 피노와 키오에게 사양지덕을 발휘하는 현상은 단순히 생존본능이라는 차원에서 설명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 디테일한 동물행태학ethology의 논의를 회피하겠으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고등한 인간의 도덕성이라고 부르는 행동의 모든 원초적 형태가 동물의 행태 속에서도 충분히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지속적으로 누적되거나 일관된 원칙을 갖지 못한다는 점은 지적될 수도 있으나 상황적으로 인간의 모든 고매한 도덕의 원형적 패턴은 동물의 세계 속에도 존재한다. 아니, 식물의 세계에서조차 모종의 도덕적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지금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우선 "본능"이라는 것은 본능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대체적으로 부정적 의미에서 사용하는 가치판단적 본능은 "문명의 상황에서 누적적으로 왜곡된 특수한 인간의 행동패턴"일 뿐이며 그것을 자연상태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고자가 "생지위성"이라고 말했을 때, 그 "성"은 "천명지위성"의 "성"과 대체적으로 맥락을 같이 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늘이 명하는 성, 즉 대자연이라는 우주생명과 끊임없이 교섭하는 성을 송유가 말하는 식의 본성이나 본질, 천리니 도심이니 하는 협애한 가치의 범주 속으로 특수화하지 않고 "생"(생긴 그대로의 모습)으로 개방시켜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도덕"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한 모든 선입견을 타파하지 않는 한 우리는 『중용』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성"을 "생"으로 개방시키지 않는 한 우리는 맹·순 이전의 웅혼한 자사의 사상 속으로 바르게 진입할 수 있는 통로를 봉쇄당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나의 논의를 나의 해석일 뿐이라고 말하면 아니 된다. 놀라웁게도 나의 논의를 정당화할 수 있는 자사의 또 하나의 저작물이 최근 고분묘의 죽간으로 발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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