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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지 있는 인문학

중용 제1장 천명지위성3

天命之謂性 3

천명지위성 3



곽점에서 나온 『성자명출 性自命出』이라는 죽간이 바로 우리의 논의의 대상인데, 이 죽간의 텍스트 문제는 여기서 논외로 할 수밖에 없다. 워낙 범위가 넓고 복잡한 문제이며 여기서 그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면 우리의 주제가 벗어나가 버린다. 관심있는 독자들은 사게의 축적된 논술자료들을 일람해주기를 바란다. 『성자명출』은 내용이 결코 적은 분량이 아닌 방대한 성에 관한 논의로서 맹자 이전의 시대로 확실하게 소급되는 문헌이다. 그 논의를 일별해보면, 『중용』 1장의 성립과정을 별도로 척출하여 후대로 내려잡아야 한다는 일인학자들의 번쇄한 고증논의를 일거에 무가치한 쓰레기로 만들어 버린다. 아마도 죽간이 나온 형문의 무덤 속에 대신 파묻어 버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한국의 학자들은 그동안 이런 고증방면을 ㅗ너무 공부한 것이 없고 성과를 집약한 학설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편할지는 모르겠으나, 오히려 긎으의 대가인 일인학자들이 무안케 되는 그 착잡한 심정 앞에 엎드려 절하며 충분한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다. 학문이란 그러한 부정을 통해서만 비약할 수 있는 것이다. 사계의 학자들은 『성자명출』이 자사의 작이라는 데 의견을 모은다. 아마도 자사의 작품 중에서 『중용』에 선행하는 초기작품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단언키 어려우나, 나 역시 『중용』과 『성자명출』을 비교해보면 『성자명출』이 『중용』의 배경을 이루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배경을 이룬다" 함은 "논리적으로 선행한다"는 뜻이다. 그 실제적 성립과정의 시간적 선후는 확정짓기 어렵다.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은 『성자명출』이 곽점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거의 대동소이한 문헌이 상박문헌上海博物館文獻 속에서도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성자명출』이 BC 4·5세기를 통하여 얼마나 확실한 존재가치를 지니는 문헌이었는지를 입증하는 대사건이라고 할 것이다. 나의 국립대만대학동학인 정원식 교수의 고증에 의하면 곽점 『성자명출』과 상박 『성자명출』이 서로의 가치를 높이는, 그리고 서로의 애매한 부분을 밝혀주는 ,호조의 상응문헌이지만, 대체적으로 곽점 『성자명출』이 상박 『성자명출』보다 더 오리지날에 가까운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제출해놓고 있다.


독자들의 『중용』1장에 관한 창조적 이해를 위하여 우리의 논의와 관련되는 『성자명출』의 앞 부분을 소개하겠다. BC 4·5세기의 중국사람들의 사고력의 치밀함과 그 개념적 사유의 도식성의 성숙도에 독자들은 응당 경이로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과연 이 문헌을 자사의 작으로 볼 수 있는지를 스스로 판단해주기를 바란다. 본문 인용은 원래의 고문자를 무시하고 오늘날의 통용문자로 환원된 방식으로 할 것이다. 그리고 결자도 보완하였다.


        凡人雖有性, 心無定志, 待物而後作, 待悅而後行, 待習而後定.

            범인수유성, 무심정지, 대물이후작, 대열이후행, 대습이후정.

        喜怒悲之氣, 性也. 及其見於外, 則物取之也. 性自命出, 命自天降.

            희노비지기, 성야. 급기견어외, 칙물취지야. 성자명출, 명자천강.

        道治於情, 情生於性. 始者近情, 終者近義.

            도치어정, 정생어성. 시자근정, 종자근의


           모든 사람은 비록 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심 자체는 하나로 정해진 지향성을 가지고 있지 아니 하다. 

           그 심은 외계의 사물과 접촉이 이루어진 후에야 비로소 발출하는 활동을 시작하며, 기쁨의 감정을 맞

           이한 후에나 비로소 발출하는 활동을 시작하며, 또 학습을 거친 후에 비로소 그 지향성은 안정된 틀을

           갖게 된다. 희·노·애·비의 기야말로 성이다.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은 바로 사물의 접촉이 그것

           을 끄집어 내주기 때문이다. 성은 명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명은 천으로부터 내려온다. 도라는 것은 

           정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며, 정이라는 것은 성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도의 시작은 정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학습을 거쳐 완성되는 종착지는 의에 가까운 것이다.


우선 여기까지만 해설을 가해보자! 물맂거으로 BC 4·5세기에 저술되고 기록된 것이 확실한 이 문헌을 접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그 정교하고 인과적 이탈이 없는 치열한 논리에 충격받지 않을 사람이 없다. 21세기의 어드밴스된 서양철학 논술이라고 말하여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이 문장은 바로, 맹자 이전의 공문 사상가들이 모여서 세미나를 벌이고 토론했던 그담론의 수준을 가늠케 한다.  이것은 그들의 심포지움, 즉 지적 향연의 소산이다. 이 첫 문단에 이미 우리가 『중용』제1장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기초개념들이 모두 등장하고 있으며, 그것들에 대한 파격적이고도 참신한 해설이 가해지고 있다. "파격"이라는 말은 지금까지 형성된 후대의 상식에 대하여 파격일 뿐이다. 그것은 파격이 아니고 선진사상의 원래적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중용』의 해석과 관련하여 이 "파격"을 감당하기 어려워하는 일인 학자들, 그리고 그에 영향받은 대륙의 소장 학자들이 이 죽간자료를 해석해나가다가 "이것은 『중용』과는 다르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뇌까리고 있으나, 그것은 그릇된 세뇌의 궤적을 일탈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치졸한 사유의 소치일 뿐이다. 나는 죽간자료가 알려지기 전에 이미 『중용』을 죽간자료가 명증하고 있는 방식으로 해석해왔다(나의 고려대학교 · 도올서원 강의). 죽간자료의 등장은 나의 해석을 보강시켜주었을 뿐이다. 『중용』은 반드시 『성자명출』과 그 개념과 사유구조가 일치되는 방향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그것이 『중용』의 원의이기 때문이다.


먼저 "범인"을 "대저, 사람은..."이라고 번역하면 안된다. "범인"은 그 자체로 독립된 하나의 명사구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라는 뜻으로, 인간의 보편성universality을 지시하는 말이다. 그것은 마치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Discourse on the Method of Rightly Conducting the Reason, and Seeking Truth in the Science』의 첫머리가 "양식은 모든 인간의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공평하게 배분되어 있는 것이다. Good sense is, of all things of men, the most equally distributed;"라는 말로 시작되는 것과도 유사하다. 모든 인간에게는 성이 공평하게 구유되어 있다는 선언이다. "범인"의 용례는 『순자』「불구不苟」편(凡人之患범인지환, 偏傷之也편상지야.) 「영욕」편(凡人有所一同범인유소일동.) 「성오」편(凡人之性者범인지성자, 堯葬之與桀跖요장지여걸척, 其性一也. 君子之與小人군자지여소인, 其性一也.)등에서 나오고 있다. 여태까지 "대저, 사람은..."이라는 식으로 번역해왔던 많은 의미론적 오류를 교정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번역의 정당성은 뒤에 나오는 "사해지내, 기성일야"라는 『성자명출』자체의 문장 속에서 입증되는 것이다.


여기 재미있는 사실은 "성"이라는 개념에 연이어 바로 "심"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근세유학, 즉 도학에 있어서는 심과 성의 관계는, 횡거가 "심통성정"을 말한 이래, 매우 대립적인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다. 성은 심중에서도 도덕적 핵moral core을 나타내는 리의 결정체로서, 인간의 도덕적 규범의 선천적 근거인 것처럼 간주되었다. 심과 성을 대립적으로 말할 때는 심은 대체적으로 정욕의 근원으로서, 도심道心 아닌 인심人心으로 폄하되었다.


그러나 여기 『성자명출』에 있어서는 성과 심은 실제로 동일대상의 동일 차원의 사태로 인식되고 있다. 성은 앞서 말했듯이 생겨난 그대로의 생이다. 선진문헌에서는 기본적으로 성이라는 글자가 생이라는 글자와 구분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성이라는 글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죽간이 발견되기 이전에도 부사년은 종정문에서 생자는 자주 발견되지만 성자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했다. 이미 우리나라 추사 김정희가 그토록 흠모했던 청대의 학자 완원도 "생"자가 "성"자의 공의라는 것을 말한 바 있다. 곽점간에는 "범인수유성"의 "성"자가 "眚생"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상박간에는 "生"으로 나타난다.


『장자』「달생達生」에 "달생지정자"라는 표현이 있고, 『회남자』「전언」에 "통성지정자"라는 말이 있다. 이 양자는 결국 같은 말인데 『장자』는 고용법을 그대로 보존하여 "생"이라는 글자를 남겨 두었고, 『회남자』는 본시 "생"이라는 글자를 "성"으로 고쳐 쓴 것이다. 인간의 "정"이라는 것은 결국 "생지정"이며, 또 "성지정"이다. "성"과 "정"모두 동일한 심적 현상을 두고 한 말이다.


그렇다면 성과 정은 왜 따로 말하는가? 성과 정은 어떻게 다른가? 『성자명출』은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매우 명료한 답안을 내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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