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의 도는 넷이 있으나, 나 구는 그 중한 가지도 능하지 못하도다. 자식에게 바라는 것으로써 아버지를 섬겼는가? 나는 이것에 능하지 못하도다. 신하에게 바라는 것으로써 임금을 잘 섬겼는가? 나는 이것에 능하지 못하도다. 아우에게 바라는 것으로써 형님을 잘 섬겼는가? 나는 이것에 능하지 못하도다. 봉우에게 바라는 것을 내가 먼저 베풀었는가? 나는 이것에 능하지 못하도다. 사람이란 모름지기 항상스러운 범용의 덕을 행하며 항상스러운 범용의 말을 삼가하여야 한다. 이에 부족함이 있으면 감히 힘쓰지 아니 할 수 없는 것이요. 이에 여유로움이 있으면 절제하고 조심하여 감히 자고치 아니 하여야 할 것이다. 언은 반드시 행을 돌아보아야 하며, 행은 반드시 언을 돌아보아야 하니, 군자가 어찌 삼가항 독실하지 아니할 수 있으리오.
참으로 돈독한 공자의 인품을 나타내는 진실한 실존적 독백이라 일컬을 만한 명문이다. 겸손과 자책의 말인 동시에,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저미게 만드는 격려와 훈계의 의도가 담뿍 들어이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군자지도사"라 하여 그 네가지 중에서 부부관계가 빠져있는데, 주희는 이 점을 착안하여 부부관계는 "도불원인"의 사태를 반영하는 능사이므로 "성인소불능"의 언급에서 빠진 것이라고 해설하나, 이것은 매우 과도한 연역적 논리에 불과하다. 아마도 공자는 순탄한 부부관계를 영위치 못한 사람이었기에, 부부관계는 언급하기조차를 꺼렸했을지도 모른다. "군자지도, 조단호부부"라고 말한 것은 실로 자사의 혁명적 사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교문명 하면, 곧바로 "삼강오륜"을 들먹이지만, 유교의 성인이라해서 반드시 오륜관계를 완벽하게 구현해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인간이 오륜관계에 있어서 결손이나 불행을 체험한다. 공자만 해도 태생 자체가 "야합"의 출산이었으며, 노부는 세살때 똘아가셨고, 꽃다운 청춘을 공자 약육에 헌신한 한 많은 어머니도 17세 때 세상을 떴다. 형제라 해도 이복형이 있었으나 불구였고, 자식도 살아 생전에 장롈ㄹ 치루어 주어야 했다. 사랑하는 제자 안회, 친구 같은 제자 자로도 몯 공자 살아 생전에 죽음을 맞이했다. 군신관계도 제댈 된 인정을 받은 적이 별로 없었고, 또 끊임없이 유랑을 해야만 했다. 이러한 공자에게 오륜의 완전한 구현을 기대한 다는 것은 도무지 어불성설이다. 따라서 네 가지 "미능"의 독백이란 실로 현실적 자기모습에 대한 적나라한 고백이요, 꾸밈없는 시인이다. 바로 이러한 정직성에 공자의 위대함이 있다. 그러나 공자는 예수처럼 ㅈ기를 찾아온 가족들에게, "누가 내모친이며 내동생이냐"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예수의 그러한 태도는 그 나름대로 논리적 정당성이 있을 것이다.
예수는 오륜의 관계를 예수운동의 가치의 구현을 위해서는 해탈되어야 할 것을로 공자나 가족관계라는 현실태에 있어서는 모두 불행을 체험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예수는 그 관계를 해탈의 대상으로 보는데, 공자는 그 관계를 지향의 귀속처로 보고 있다. 공자가 오륜관계에만 충실한 인간어있다면 공자는 오늘의 공자가 될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불행한 오륜관계 그 자체를 자신의 철학의 궁극적 구현이 장으로 보고있다. 이 아이러니가 유교의 본질이다. 유교는 결코 편협한 가족주의의 테두리에 머물러 있는 철학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편협한 가족주의 초월을 통하여 보편적 가족관계를 완성시키고자 하는 중층적 가치관의 소산이다. "신독"은 내면의 심화과정이다. 존재의 고독의 종적인 심연이다. 그러나 그러한 고독의 시화는 반드시 오륜이라는 존재의 횡적 그물망을 통하여 교섭의 장을 마련하며, 개인적 실존 내면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구현한다. 오륜은 근원적으로 결손과 불행과 좌절의 연속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해탈하거나 초탈하거나 방기될 사 사태가 아니라, 존재의 가치의 구현의 장이로서 항상 끊임없이 지향되어야 하는 것이다. 가족관계의 현실태를 가지고서 한 인간의 인격가치를 다 형량할 수는 없다. 그 배면에 깔린 그의 지향성의 정의로움을 간파해야 할 것이다. 오륜 또한 이러한 배움의 영원한 지향적인 것이다. 공자의 겸손, 자책의 인품이 짙게 드러나는 명언이라 할 것이다.
미능의 네가지 독백 이후에 곧이어 등장하는 말이 "용덕지행"과 용언지근"이다. "용"의 의미에 관해서는 이미 그것이 범용, 일상론의 의미에 국한되지 않는 매우 우주론적 도의 본체론적 성격이 있다는 것은 이미 장자 제물에 나오는 "용"의 용례에 즉하여 충분히 해설하였다. 그것은 일상적인 작용의 세계의 세계인 동시에 만물에 통하고 자득하여도 구현하는 본체적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용덕"은 범용의 덕성인 동시에 가장 항상스러운 덕이며, 가장 본질적인 덕이며, 모든 만물과 상통하는 작용을 지니 보편적인 덕이다.
우선 "용덕지행"과 "용언지근"이라는 말은 덕은 행의 대상이고, 언은 근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수 있다. 그 뒤에 나오는 말을 보면 덕은 곧 행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덕성이란 행동을 통해서 쌓여가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말이란 그 자체로서 가장 중요한 측면은 "삼감"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말이란 삼가야 하는 것이다. 말을 많이 해서 좋은 것은 마무 것도 없다. 공자가 가장 싫어한 것이 "교언영색"이다. 교언이란 결국 삼갈 줄을 모르고 요리조리 돌려대며 주절거리는 것이다. 우리 집에 누가 왔을 때도 내가 가장 저주스럽게 느끼는 것은 핵심없이 주절거리며 궁뎅이가 무거운 자들이다. 공자의 사상과 노자의 사상이 판이한 것 같지만 알고보면 다 상통하는 것이다. 노자가 말하는 도와 덕도 결국 언고 행의 문제로 바꾸어 생각할 수도 있다. 도경의 주제는 인간의 사유, 언어, 말의 문제이며, 덕경은 인간의 행동을 주제로 한 것이다. 도라는 개념 속에 길이라는 뜻과 말이라는 뜻이 같이 들어있다. 요한복음의 로고스의 용례와도 상통하는 것이다. 맹자 진심 하33에 이런 말이 있다.
경덕을 실천하고 사특한 굽힘이 없는 것은 녹을 구하기 위해서 그러함이 아니요, 언어가 반드시 신험이 있는 것은 행동이 바른 사람이라는 것을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 군자는 당연한 법을 행항 명을 기다릴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경덕과 언어가 중용의 용덕, 용언에 상통한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덕이란 항상스러운 덕이며 떳떳한 덕이며 자연스러운 덕이다.
순자 불구 편에도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용언이 반드시 신험이 있고, 용행이 반드시 신중하고 삼가며, 세속적 흐름을 본받을까 항상 두려워하여 감히 독선적 판단을 내리지 않는 사람, 이와 같은 인물을 우리는 각사라고 부른다. 언이 항상 신험이 없으며, 행이 항상 조심성이 없으며 이익이 생길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리지 않고 따라다니는 사람, 이와 같은 인물을 우리는 소인이라고 부른다.
이는 순자가 인간에 있어, 통사, 공사, 직사, 각사, 소인이 라는 다섯가지 유형이 있다고 전제하고, 마지막 두 유형을 해설하는 대목이다. 중용의 용덕, 용언, 이 아예 용행과 용언이라는 표현으로 바뀌어져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언행의 문제로 명료하게 인식하고 있다. 자사의 사상이 후대에 발전적으로 나타나는 경로를 더듬어 볼 수 있다. 주역에도 공자의 말로써 인용되고 있는 다믕가 같은 표현이 있다.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다. 이 구이의 효의 모습은 용덕을 구현하여 정중을 지키는 사람의 모습이다. 용언을 항상 신험 있게 하며, 용행을 항상 삼가하다. 사를 막아 그 내면의 성을 존하다. 세상을 선하게 만들어 가면서도 그것을 남에게 내보이거나 자랑하는 법이 없다. 그 덕이 너무도 크고 넓어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감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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