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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지 있는 인문학

중용 제13장 13-3(4). 충서위도불원, 시제기이불원, 역물시어인.

예수보다 약 2·30년 전에 앞서 활약한 랍비운동the rabbinic movement의 창시자 중의 한 사람인 힐렐Hillel the Elder(그는 랍비라는 말로 호칭되지 않고 "장로"로 호칭된다. BC 60년에서 AD 20년에 걸쳐 활동)은 토라의 가치관을 요약하여 이와 같이 말하였다:"네가 원치 아니 하는 바를 네 이웃에게 베풀지 말라. 이것이 토라의 전체이다. 나머지는 이에 대한 해석일 뿐이다. 부지런히 실천하라. What is hateful to you, do not do to anyone else: that is the whole Torah, while the rest is commentary thereon; go and learn it"(b. Shabbath 31a). 헬레니즘 세계에 있어서도 이러한 부정적 형태의 황금률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플라톤과 동시대의 교육자이며 웅변가이며 수사학자였던 이소크라테스Isocrates, BC 436~338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너희가 다른 사람에게서 당할 때 화를 내는 그런 것을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말라."(Isokrates, Nicol.[Cypr.] 61)


유대교의 지혜문학은 대체로 공자와 동일한 네가티브 포뮬레이션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토비트서The Book of Tobit(4:15)에도, "네가 싫어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말라"라는 표현으로 황금률이 기술되어 있다. 불교의 원시경전중 가장 초기에 속하는(소부小部 Khuddaka-nikaya) 싯달타의 말씀모음집인 『숫나티파타 Sutta-nipata』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그들도 나와 같고, 나 또한 그들과 같다"고 생각하라. 다른 사람을 나의 몸과 같이 여겨, 살해하거나 또한 

남을 시켜 살해해서는 아니된다(705).


그리고 같은 성격의 원시경전인 『법구경法句經, Dhammapada』에도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나온다. 


모든 생명의 폭력을 두려워한다.

모든 생명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나의 몸의 느낌을 잣대로 하여,

결코 남을 죽이거아, 해쳐서는 아니 된다(129).


주희장구 : 자기의 마음을 다하는 것을 "충忠"이라 하고, 자기를 미루어 남에게 미치는 것을 "서恕"라고 한다. "위違"라는 것은 "···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뜻이니, 『춘추좌씨전』에 제나라 군대가 "곡땅으로부터 7리쯤 떨어져 있다"라고 말할 때의 "위違"(…으로부터)와 같은 용법이다. 여기서부터 저기에 이르기까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멀지 않다는 뜻이니, 등돌리고 멀리 가버린다는 동사적 뜻이 아니다. 도道는 곧 사람에게 멀리 있지 아니 하는 것을 또한 남에게도 베풀지 말라는 것은 "충서"의 일이다. 자기의 마음으로써 타인의 마음을 헤아려 보면 인간의 마음은 공통성이 있는 것이니, 도가 인간에게서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내가 원치 아니하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것은 또한 도가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아니 하다고 생각하여 도를 샐천하는 일이다. 장횡거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써 남을 사랑한다면 곧 인을 다한다"라고 하셨는데, 바로 이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장구옥안 : "위곡칠리"라는 인용문은 『춘추좌씨전』 애공 27년조에 나온다. 여름철 4월 기해 날에 계강자가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가 있고 그 뒤로 나온다. "위곡칠리의 "위"는 본동사가 아닌 전치사적인 용법이라는 것이다. "from"의 뜻이다. 주희의 문법적 감각이 섬세하다. 주희는 경전의 본문을 자기 나름대로 명료하게 이해하고 그 이해한 바를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치열한 태도가 있다. 요즈음의 학자들보다 더 명료하고 명석하다. 고문에서 "기"와 "인"이 짝을 이루고 있을 때는 "나"와"남"으로 해석된다.



13-4. 君子之道四, 丘未能一焉: 所求乎子, 以事父, 未能也; 所求乎臣, 以事君, 未能也; 所求乎弟, 以事兄, 未能也; 所求乎朋友, 先施之, 未能也. 庸德之行, 庸言之謹, 有所不足, 不敢不勉, 有餘不敢盡. 言顧行, 行顧言, 君子胡不慥慥爾!"

13-4. 군자지도사, 구미능일언:소구호자, 이사부, 미능야; 소구호신, 이사군, 미능야; 소구호제, 이사형, 미능야; 소구호붕우, 선시지, 미능야. 용덕지행, 용덕지행, 용언지근, 유소불족, 불감불근, 유여불감진. 언고행, 행고언, 군자호불조조이


옥안 : 참으로 돈독한 공자의 인품을 나타내는 진실한 실존적 독백이라 일컬을 만한 명문이다. 겸손과 자책의 말인 동시에,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저미게 만드는 격려와 훈계의 의도가 담뿍 들어있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군자지도사"라 하여 그 네 가지 중에서 부부관계가 빠져있는데, 주희는 이 점을 착안하여 부부관계는 "도불원인"의 사태를 반영하는 능사이므로 "성인소불능"의 언급에서 빠진 것이라고 해설하나, 이것은 매우 과도한 연역적 논리에 불과하다. 아마도 공자는 순탄한 부부관계는 언급하기조차르 꺼려했을지도 모른다. "군자지도, 조단호부부"라고 말한 것은 시로 자사의 혁명적 사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교문명 하면, 곧바로 "삼강오륜"을 들먹이지만, 유교의 성인이라 해서 반듯이 오륜관계를 완벽하게 구현해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인간이 오륜관계에 있어서 결손이나 불행을 체험한다. 공자만 해도 태생 자체가 "야합"의 출산이었으며, 노부는 세 살 때 돌아가셨고, 꽃다운 청춘을 공자 양육에 헌신한 한 많은 어머니도 17세 때 세상을 떴다. 형제라 해도 이복형이 있었으나 불구였고, 자식도 살아 생전에 장례를 치루어 주어야 했다. 사랑하는 제자 안회, 친구 같은 제자 자로도 모두 공자 살아 생전에 죽음을 맞이했다. 군신관계도 제대로 된 인정을 받은 적이 별로 없었고, 또 끊임없이 유랑을 해야만 했다. 이러한 공자에게 오륜의 완전한 구현을 기대한다는 것은 도무지 어불성설이다. 따라서 네 가지 "미능"의 독백이란 실로 현실적 자기모습에 대한 적나라한 고백이요, 꾸밈없는 시인이다. 바로 이러한 정직성에 공자의 위대함이 있다. 그러나 공자는 예수처럼 자기를 찾아온 가족들에게,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마 12:48, 막 3:33, 눅 8:21, 도마99장에도 이 로기온이 들어있다. 누가의 형태가 도마의 원형을 가장 근접한 방식으로 계승하고 있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예수의 그러한 태도는 그 나름대로 논리적 정당성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