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 제13장 13-3. 忠恕違道不遠, 施諸己而不願, 亦勿施於人.충서위도불원, 시제기이불원, 역물시어인
13-3. 충서는 도로부터 멀리 있지 아니 하다. 자기에게 베풀어보아 원하지 아니 하는 것은 또한 남에게도 베풀지 말지어다.
옥안 : 우선 "충서忠恕"가 같이 한 단어처럼 언급되고 있는 맥락에서 보면 결코 "충"과 "서"를 구별되는 두 개의 대립적 개념으로 논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주희는 "충"과 "서"를 제와 용의 관계로 파악하여, 충을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 상달上達의 세계로, 서를 천하지달도天下之達道, 하학下學의 세계로 말하는 다양한 논의를 펼치고 있으나 이러한 논의는 기실 과도하게 이념적인 해석이다. 충과 서는 그 본질적 의미에 있어서 상통된 개념들로서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는 것이며, 그 뜻이 그토록 예리하게 대립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주희가 이곳의 주석에도 "자기의 마음을 다하는 것을 충이라 하고, 자기를 미루어 타인에게 미치는 것을 서라고 한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이미 황간이 『논어』 소에서 "충이란 자기 내면 한가운데 마음을 다하는 것을 일컫는 것이요, 서란 자기를 헤아려 사물을 형량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한 것을 계승한 것이다.
충과 서를 진기와 추기로 보는 것은 대체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견해이지만, 그것은 충과 서를 회의자會意者로 보아 "중심"과 "여심"으로 풀이하는 데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가 반드시 옳은 해석일 수만은 없다. 충과 서는 회으자가 아닌 형성자 일 수도 있다.
하여튼 충과 서가 한 개념으로서 등장한 것은 『논어』 「이인里仁」15를 효시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로기온 자료의 배경설정은 사뭇 재미있다.
이 로기온자료는 중자가 독립된 학파를 따로 이루고 있고 증자가 자기자신의 문제들과 함께 강론하고 있는 곳을 공자가 지나가다 들러, 증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러한 설정자체가 매우 어색하다. 중자는 공자가 서거했을 때 불과 27세의 나이였다. 그는 자장과 함께 공문의 막내 등이 어린 사람이었으며 사과십철의 문턱에도 갈 수 없는 미미한 존재였다. 그런데 공자 생전에 독립된 학단을 따로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물론 이것은 역사적 사실의 기술이라기보다는, 증자가 공자의 사후에 공문의 학통을 이어 훌륭한 학파를 형성했다고 한다면, 그 후대의 증자학파에서 증자의 적통을 확립하기 위하여 이러한 로기온자료를 하나의 드라마로서 구성했다고 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사태일 것이다. 공자는 증자에게 이와 같이 말한다: "오도일이관지吾道一以貫之"(나의 도는 하나로 모든 것을 꿰뚫고 있다). 이에 증자는 그 말뜻을 알아차리고, "예,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공자는 표연히 수레를 몰며 그 자리를 뜬다. 그러자 증자의 문제들이 증자에게 다가와서 묻는다: "지금 하신 공자님 말씀이 무엇을 이른 것이오니이까?" 증자가 대답한다: "선생님의 도는 충서일 뿐이다."
하여튼 이 로기온자료는 주희가 매우 높게 평가하고 엄청나게 공들인 주석을 달았기 때문에, 송대 이래고 유학을 대변하는 대표적 로기온으로서 주석가들이 가장 애용하는 문구가 되었다. 그러나 이 로기온자료는 실로 「위령공」2와 23의 두 기존의 로기온자료를 합성하여 구성한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나의 『논어한글역주』(제3권, 175~185) 속에서 샅샅이 논증하였다. 공자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충서"라고 운운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 그리고 공자는 결코 "충서"를 같이 말한 적이 없다. 자공이 "일언으로 종신토록 행할 맣나 것이 과연 있겠나이까?"라고 묻는 질문에 대하여 그냥 공자는 평이하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을 뿐이다: "있지!있어! 서 그 한마디면 족해.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베풀지 말지어다."
자사는 바로 이 공자의 "서"의 사상을 계승한 것이고, "충"은 그 앞에서 뜻을 강화하기 위하여 얹어놓았을 뿐이다. 하여튼 『중용』 13장에 "충서"가 같이 한 개념으로 언급되었다는 것은 자사가 증자학파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논어』의 "기소불욕 물시어인"이라는 구절의 네가티브한 성격을 성격을 더 구체적으로 강조하여 "시저기이불원, 역물시어인"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놓았다는 사실이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을 "나에게 베풀어보아 원하지 아니하는 것은"으로 바꾸어 표현했다는 것은 "나의 느낌상 원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매우 구체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이라는 부사를 삽입하여 그 강조의 의미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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