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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지 있는 인문학

중용 제13장 13-3(2). 충서위도불원, 시제기이불원, 역물시어인.

중용 제13장 13-3(2). 忠恕違道不遠 施諸己而不願, 亦勿施於人. 충서위도불원, 시제기이불원, 역물시어인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예수의 산상수훈 The Sermon on the Mount에도 이와 비슷한 논의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17세기부터 영어문화권에서 "황금률Golden Rule or Golden Law"이라고 불리어져서 특별하게 기독교사상을 대변하는 말로서 잘 인용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논어』나 『중용』과는 달리 네가티브가 아닌 포지티브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이다. 공자가 "기소불욕, 물시어인"을 말하고 있다면 예수는 정확하게 그 반대적 표현인 "기소욕, 시어인"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7:12와 누가복음 6:31에 같이 나타나는 이 구절은 큐자료에 속하는 것인데, 누가쪽이 더 원자료에 가깝다고 본다. 여하튼 예수의 로기온자료 중에서는 초기전승에 속하는 오리지날한 자료임에 틀림이 없다. 마태복음 7:12의 우리말 번역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마태는 누가자료에 비해 "무엇이든지 panta, in everything"라는 표현이 첨가되어 있고,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리나 for this is the law and the prophets"(이것이야말로 토라와 네비임에 쓰여져 있는 말씀들을 성취시킨다는 뜻이다)라는 표현이 이 첨가되어 있다. "무엇이든지"라는 표현은 이 황금률이 특정한 행위에 대한 특정한 도덕적 구너명이 아닌 일반원리를 천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방증하낟. 그런데 이 기독교의 황금률과 공자의 서恕는 자주 병치되어 논의되면서도, 그 네가티브한 성격과 포지티브한 성격의 차이는 인간세의 진정한 보편주의의 규정에 관하여 매우 심각한 견해차이를 보이는 것이며, 어쩌면 유교문명권과 기독교문명권의 모랄구조를 근원적으로 차별지우는 중대한 성격의 핵심적 사태일 수도 있다.


인간세의 보편성universality이란 현실적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정의 호상성reciprocality을 바탕으로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리理적 규정성일 수 없다. 정情이란 반드시 쌍방적 관계를 모두 충족시켜야 하는 것이다. "기소욕," 즉 내가 원하는 것, 그리고 "남이 나에게 해주기를 원하는 것whatever you wish that men would do to you"이란 수학공식이나 보편적 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지적 판단을 포섭하는 정감情感, 즉 정리情理의 문제이다. 이러한 정감의 보편성에 있어서 호상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네가티브한 포뮬레이션은 독단이나 독선, 강요, 지배의 논리로 함몰되기 십상이다. 나의 선의는 어디까지나 나의 감정의 심연에서 발출되는 의지이며 그것은 일차적으로 주관적인 것이다. 칸트는 내 마음 속의 도덕률das moralische Gesetz in mir이야말로 감탄과 경외를 자아내는 궁극적인 도덕의 근거라고 말했지만, 그러한 선험적 보편성이란 도덕의 차원에서는 매우 애매한 것이다. 현실적 인간을 규정하는 형이상학적 가설은 될 수 있을지언정 불완전한 인간을 토대로 하는 현실적 도덕률은 될 수가 없다. 가장 결정적인 사태는 "내가 좋아하는 것""내가 사랑하는 것""내가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꼭 타인이 좋아하고 사랑하고 나와 똑같이 선이라고 생각한다면 보장은 전혀 없는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의 공통분모는 찾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황금률로서, 인간세상에 적용되어야 할 보편적 규칙으로서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쓰던 중 어제 저녁 한국에서 매우 존경받는 영화감독 노거장의 개봉작품 시사회에 초청을 받았다. 탈고기한에 쫓기느라고 시간이 없어 나갈수가 없었지만 그의 간곡한 청이 있어서 시사회장에 나갔다. 그러자 큰 로펌도 운영하고 이 세계를 영성으로 운영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잡지도 발간하는 어떤 가톨릭신자 변호사가 나에게 접근을 하여 잡지 인터뷰를 요청하는 것이다. 명함을 보니 빌딩도 소유하고 박사학위까지 있으니, 돈과 구너력과 지식과 명성과 종교와 선의를 모두 갖춘 훌륭한 교양인인 듯했다. 그러나 내가 굳이 시간이 없어 사람과의 접촉조차 꺼리고 있다고 간곡히 사양하는데, 온갖 빈정거리는 투로 집요하게 자기와 같이 모든 것을 갖춘 위대한 인물과 인터뷰를 해야 한다고 나의 감정을 거스르는 것이다. 내가 사양하면 사양하는 말꼬투리를 잡아 반론을 펴는 것이다. 내가 시간 없다고 말하면 자기도 시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자기와의 인터뷰의 위대성을 역설하고내 시간을 뺏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그러한 집요한 행위가 칸트가 말하는 것처럼 별이 총총한 밤하늘과 더불어 그의 마음속에서 빛나는 선의지의 발로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너무 쉽게 부닥칠 수 있는 하나의 실례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것은 어쩌면 로마제국주의이래 서구문명이 이 세계를 다스려운 방식에 관하여 성찰이 결여된 근원적인 오류에 속하는 결정적인 실례일 수도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도 베풀어야 한다는 포지티브 포뮬레이션은 지극히 위험한 발상이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공자의 네가티브 포뮬레이션은 지극히 위험한 발상이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공자의 네가티브 포뮬레이션이야말로 인간세의 정감의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규정이다. 모든 보편성은 네가티브해야 한다. 그것은 최소한의 규정성에 머물러야 한다. 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령도 기실 도덕적 내용의 규정의 내용이 아닌 최소한의 형식적 규정에 불가한 것이다. 보편성의 확보는 소극적일 수밖에 없으며 형식적일 수밖에 없다. 공자는 최소한의 형식적 규정성을 네가티브 포뮬레이션을 통하여 제시한 것이다. 네가티브 포뮬레이션이야말로 서라는 추가급인의 보편성, 즉 호상적 마음의 보편성을 확보하는 가장 근원적 테제라고 파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