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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지 있는 인문학

중용 제13장 13-3(3). 충서위도불원, 시제기이불원, 역물시어인.

중용 제13장 13-3.(3) 忠恕違道不遠 施諸己而不願 亦勿施於人 충서위도불원, 시제기이불원, 역물시어인     


불트만은 예수의 말씀의 가장 핵심적 태제로서 "사랑의 계명The Commandment of Love"을 제시한다.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께서 대답 잘 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신 거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으니라(막 12:28~31)


불트만은 이 마가자료를 구약과의 단절 속에서 해설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인간의 정감상의 어떤 이상적 목표human ideal가 아니며 신에 대한 절대적 복종, 신 앞에서의 자아의 절대적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가치있기 때문에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 대한 자신의 절대적 포기와 복종의 증표로서 인간에 대한 사랑이 맥락지워질 뿐이다. 신 사랑의 정신에 따라 이웃사랑이 결정되며, 이웃사랑을 통해 신사랑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윤리적 원칙이나 인도주의적 명령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2계명은 철저히 제1계명에 복속되는 것이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논리적 사유의 결단이 아니라 무조건적이고 즉각적이며 비개념적인 의미에서 절대적이다. 사유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나 자신도 온전하여야만 한다(마 5:48). 아버지의 자비하심과 같이 나 자신도 자비로와야 한다(눅 6:36). 용서는 사랑할 때문이 가능한 것이며, 사랑은 감정이 아닌 신의 명령이다. 그리고 이웃은 이 사람 저 사람이 아닌 전인全人이요 모든 사람이다(불트만의 『예수와 말씀Jesus and the Word』, 「사랑의 계명」장을 볼 것)


이러한 불트만의 해석은 기독교윤리의 고등성에 관한 매우 강력한 테제를 제시하는 발언이지만, 과연 그것이 참으로 예수의 로기온의 원 맥락이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불트만의 이러한 해석은 하이데거의 실졵의의 색다른 윤색일 수도 있다. 우선 예수가 말하는 두 계명이 모두 예수의 말이 아니고, 구약의 구절의 인용일 뿐이라고 할 때,과연 예수의 말슴의 의도가 그토록 구약의 원래맥락으로부터 단절된 어떤 새로운 것을 주창하는 것인지도 확정지울 수 없다. 우선 제1계명은 유대인이라면 누구든지 아침과 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씩 암송해야만 하는 쉐마라는 신앙고백에 속하는 것으로 신명기6:4~5에 나오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 쉐마(신명기 6:4~9, 11:13~21, 민수기 13:37~41)를 양피지에 깨알같이 써서 말아 매주자Mezuzah라고 불리는 대롱에 넣어 문설주 상단에 부착시킨다. 사실 이 제1계명은 "이스라엘아! 들으라!"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듯이 매우 민족주의적인 것이며 진부한 문구일 수도 있다. 그리고 제2계명은 레위기 19:81에 나오는 것으로, 그 전후맥락을 보면 "이웃"이란 이스라엘 동포형제에 국한되는 것이다. 예수의 본래 로기온이 마가자료와 같이 구약의 인용형태를 취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부정적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최근 새로 발견된 도마복음서 자료는 이와 같이 되어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형제를 네 영혼과 같이 사랑하라. 그 사람을 네 눈의 동자처럼 보호하라."

Jesus said, "Love your(sg.) brother like your soul, guard that person like the pupil of your eye."(Th.25)


사실 예수의 원래의 로기온은 구약의 인용이 아닌 예수운동Jesus Movement의 실제적 정황과 관련된 평범한 말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자료를 마가가 드라마타이즈 시키면서, 사두개인들과의 부활에 관한 복잡한 구약문헌 논쟁을 도입하였고, 그 여파로 구약적 맥락에서 이 로기온을 다시 규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도마자료에서 "이웃"이란 예수의 도반들followers일 뿐이다. 도반들끼리의 호상 보살핌을 강조한 소박한 표현이며 모든 이방인을 포괄하는 전인류적 메시지는 아닌 것이다. 불트만의 해석은 비맥락적인 과도한 해석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다. 그러나 불트만의 해석의 "절대성"의 위대한 측면을 내가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기독교윤리가 지나치게 포지티브 포뮬레이션의 명제를 강조할 때, 그것은 매우 고도의 헌신적, 희생적 삶의 형태를 창출해낼 수도 있지만, 무섭게 독선적인 위선을 인류사회에 만연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전 인류를 내 몸과 같이 절대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매우 실천 불가능한 공허한 명제일 수도 있다. 전 인류를 내 몸과 같이 절대적으로 사랑한다고 하는 대부분의 크리스챤들이 왜 그토록 북한동포는 저주하는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명제를 실천한다. 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억압하고 강제하고 개종시키면서 인간 본연의 스스로 그러한 문화와 모랄을 말살시켰는가? 그것보다는 "네가 원치 아니 하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공자의 말씀이 휠씬 더 리얼한, 실현 가능한, 지혜로운 도덕률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유교에는 포지티브 포뮬레이션은 전혀 없는가? 물론 있다. 공자는 인의 실현방법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도 서게 하며, 자기가 달성코자 하면 남도 달성케 해준다.


인이라는 것은 초월자에 대한 절대적 복종이 아닌,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만물과의 느낌의 교호작용이다. 그것은 느낄 줄 아는 감수성이며, 공감의 세계이다. 따라서 여기 입인과 달인은 일방적인 헌신이나 희생이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호상적인 공생, 공영의 문제이다. 입인의 주체는 타인 그 본인이지 내가 아니다. 내가 서고자 한다면, 타인이 스스로 서고자 하는 노력을 도울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유교가 강조하는 것은 주체의 자발성이다. 따라서 "물시어인"이라는 것이 소극적인 이기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칸트 제 3비판이 주장하듯이 인간에게는 분명 느낌의 공통성이 있으며 그 공통성은 개별적 특수성과 인간 보편자의 보편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기소불욕", "물시어인"은 네가티브 포뮬레이셔이지만 포지티브한 인간의 공영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