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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지 있는 인문학

중용 제12장 12-2. 부부지우, 가이여지언, 급기지야

중용 제12장 12-2. 夫婦之愚, 可以與知焉, 及其至也, 雖聖人亦有所不知焉; 夫婦之不肖, 可以能行焉, 及其至也, 踓聖人亦有所不能焉. 天地之大也, 人猶有所憾. 故君子語大, 天下莫能載焉; 語小, 天下莫能破焉. 부부지우, 가이여지언, 급기지야, 수성인역유소불지언; 부부지불초, 가이능행언, 급기지야, 수성인역유소불능언. 천지지대야, 인유유소감. 고군자어대, 천하막능대언; 어소, 천하막능파언.


12-2. 보통 부부의 어리석음으로도 가히 더불어 군자의 도를 알 수 있는 것이어늘, 그 도의 지극함에 이르게 되면 비록 성인이라 할지라도 또한 알지 못하는 바가 있다. 보통 부부의 못남으로도 가히 더불어 군자의 도를 실행할 수 있는 것이어늘, 그 도의 지극함에 이르게 되면 비록 성인이라 할지라도 또한 실행하지 못하는 바가 있다. 너무도 너무도 거대한 천지의 불확정성에 관하여 평범한 사람들은 유감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대소 우주의 경지르 통달한 군자가 거대한 것을 말하면 천하가 능히 그것을 싣지 못하며, 극소한 것을 말하면 천하가 능히 그것을 깨지 못한다.


옥안 : 군자의 도는 인간이 태어나서 구현해야 할 지당한 지고의 길이다. 군자는 중용을 실천하고 소인은 중용에 반한다는 명제로 시작한 공자의 말씀에 대하여, 자사는 군자의 도는 비한 동시에 은한다는 명제로써 총론적 강령을 제시한 후에, 그 "비이은"은 다시 지고의 경지와 평범의 경지, 매크로한 세계와 마이크로한 사계의 분별과 융통이라는 다이내믹한 사유의 시펙트럼으로써 제시하고 있다. 19세기말, 20시게초로부터 동방인들이 서구인의 민주적 가치를 수용하면서부터 전통적 유교를 부정적인 관점에서 조명하였던 가장 근원적인 이유는 바로 유교에 인간에 대한 보편적 존엄성의 관념이 희박하다는 것이었다. 공자도 "오직 여자와 소인은 기르기가 어려우니, 가까이하면 불손해지고 멀리하면 원망한다."라고 말했는데, 과연 이것이 공자 자신의 말로써 당대에 기록된 것인지는 문헌비평적 시각에서 분석할 때 좀 문제가 있으나, 하여튼 유교가 여성의 문제에 각별한 배려를 하지 못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모두 선택적 시각의 왜곡에서 유래되는 것이다. 서양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동양에서 무엇을 선택하는가? 시·공을 넘나들며 서양에서 가장 좋아보이는 것만을 선택하고 동양에서 가장 나빠 보이는 것만을 선택하여 비교한다면 자비·자괴를 모면할 길이 없을 것이다. 공자 당대에만 해도 이미 도가적 사유는 남성성에 대한 여성성의 가치적 우위를 말하고 있으며, 우주의 본질적 포스로서 여성을 예찬하고 있다. 서구에서도 여성에 대한 관념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세의 사건에 속하는 것이다. 남성중심·여성비하적 사유는 신·구악성서에서도 무수히 발견되는 것이며 근세 계몽주의사상가들의 저작 속에서조차 전혀 개명되지 못한 사유형태로 남아있다. 이러한 사태에 비유하여 본다면 자사가 여기 "부부지우"를 운운한 것은 가히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정현이 "부부"를 "필부필부"라고 주했는데 그것은 매우 적확한 해석이다. 아주 평범한, 계급적·신분적 전제가 전혀 없는 보편적 선남선녀의 부부를 "비이은," 즉 매크로한 동시에 마이크로한 군자지도의 주체로서 설정했다고 하는 것은 유교철학적 인간관의 보편주의를 입증하는 하나의 비약적 사태이다. 성인이라 할지라도 다 알 수 없고 다 행할 수 없는 지고한 군자지도의 실천적 주제로서 아주 평범한 부부의 삶을 설정했다고 하는 것은 중용철학의 심오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범용의 성스러움"의 한 역설이다. 서양사상에는 이러한 범용에 대한 예찬이 전무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은 간間의 존재이다. 간이란 나라는 존재를 형성시키는 모든 인간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 관계를 유교철학에서는 오륜이라고 불렀는데, 그 오륜 중에서도 가장 본질적인 것이 부부라는 간이다. 군신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계약적인 것이며 하시고 무화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전혀 필연적인 간의 요소가 아니다. 반무도하면 군신관계는 포기되어야 한다. 군에 대한 충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군의 인품의 여하에 달려있는 것이다. 부자의 관계는 혈연적인 것이라서 필연적인 것이지만 매우 동질적이며 일가의 범위 자체 내에 머무는 것이다.


그러나 부부란 매우 이질적이면서도 창조적인 것이며 모든 생성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사회는 부부를 핵으로 하여 형성되는 것이다. 부부관계가 선행되지 않으면, 부자관계도 군신관계도 성립되지 않는다. "나"라는 존재도 거대한 세포들의 사회이다. 그러나 그 사회를 형성시킨 최초의 세포가 바로 난자와 정자라는 이질적인 이형배우자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부부관계가 선행되지 않으면 여하한 사회도 성립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부부라 할지라도 그들이 체험하는 평범한 삶의 가치 속에 성인이 추구해야 할 모든 지고·지난의 경지가 함축되어 있다고 설파하는 자사의 논리는, 여하한 서구종교의 "구원론"적 선택주의를 초탈해버리는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구원의 대상일수가 없다. 인간은 오직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간은 "선택"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선택받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에게로 초월할 것이 아니라 오직 평범한 부부의 삶의 장으로 진입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약 구원의 주체라고 한다면 그 존재야말로 평범한 부부의 체험 속에서 구원을 획득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부부의 어리석음이 그 자체로 정당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성인의 경지로서 심화되어가는 과정에 참여해야만 그 정당성을 부여받은 것이다. 부부의 어리석음으로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을 성인도 다 알 수가 없다고 하는 역설은 곧 부부의 어리석음이야말로 성인의 경지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포섭적인·역동적인 장이라고 하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자사는 절대적 타자를 다시 범용 속으로 타자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천지지대야, 인유유소감"이라고 하는 표현은 천지의 거대함이 모두 예측가능한 필연적 법칙에 예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뉴톤 물리학적인 필연주의적 발상이 자사의 우주인식에 있어서는 거부되고 있다. 자연현상은 예측불허의 불규칙성을 나타내고 있다. 지진이나 홍수와 같은 천재지변이 예측한 대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도는 천지를 다 장악하지 못한다. 그래서 인식의 한계가 있는 인간은 "천지지대"(천지의 큼)에 대하여 유감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노자가 말하는 "천지불인"사상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 "어대"와 "어소"긜고 "막능재"와 "막능파"를 말하는 자사의 사유의 스케일 속에는 현대물리학이 말하는 우주론적 모델이나 소립자의 세계에 관한 이론에 유사한 발상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은 확언할 수가 있다.


주희장구 : "여"는 거성이다. 군자의 도는 가깝게는 부부가 한 집에서 생활하는 일상성으로부터 멀게는 성인이나 하늘이나 땅이 다 구현해내지 못하는 다양성에 이르고 있다. 그 광대함으로 말할 것 같으면 밖이 없으며, 그 극소함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안이 없으니, 진실로 "비"라고 말할 만한다. 그러나 그 이치가 그렇게 되는 그 본체로 말할 것 같으면 "은"하여 드러나지 않는다. 본문에 "가지" "가능"이라고 말한 것은 도 가운데의 하나의 사태에 국한하여 말한 것이다. 그 지극한 데 이르러서는 성인이라 할지라도 "부지"하고 "불능"하다고 말한 것은 그 전체를 들어 말한 것이니, 성인도 진실로 다하지 못함이 있는 것이다. 정이의 제자인 후중량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성인도 알지 못하는 바가 있다는 것은, 공자가 노자에게 예를 물었다는 사례나, 공자가 담자에게 관제에 관하여 배운 사례 등등을 말한 것이다. 성인도 실천하지 못하는 바가 있다는 것은, 공자가 위를 얻지 못했다든가, 요·순조차도 "박시"(넓게 백성들에게 베풂)를 어렵게 여기었을 것이라고 말한 사례 등등을 가리킨 것이다." 내가 생각컨데, 사람이 천지에 대하여 유감이 있다고 하는 것은, 하늘이 덮어주고 땅이 실어주어 만물을 생성하는데 있어서 치우침이 있는 것, 그리고 추위와 더위, 재앙과 상서가 그 바름을 얻지 못한 것을 일컫는다. 


장구옥안 : "가지" "가능"이라는 것이 "도중지일사"라고 말한 것은 좀 편협한 주희의 해석이다. 부부의 어리석음과 성인의 경지를 같은 차원에서 해석하지 못하는 송유들의 분별의식은 자사의 사상의 정수를 망가뜨린다. 그리고 주희가 후중량의 사례열거를 인용한 것도 치졸하기 그지없는 발상이다. 송유들의 사고의 수준이 자사의 사유의 웅혼함에 한 터럭만큼도 못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