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 제13장 13-1. 子曰 : "道不遠人, 人之爲道而遠人, 不可以爲道. 자왈 : 도불원인, 인지위도이달인, 불가이위도
중용 제13장 13-1.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아니 하다. 사람이 도를 실천한다 하면서 도가 사람에게서 멀리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는 결코 도를 실천하지 못할 것이다.
옥안 : 주희의 말대로 이것을 수장首章의 "도야자道也者, 불가수유리야不可須臾離也"의 테마를 부연설명한 것으로 보는 견해는 타당성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도불원인道不遠人"을 일단 하나의 명제로서단락 지우고 다음의 말을 해석하였다. 그런데 "도불원인"을 모두 수장의 "솔성지위도"와 관련지어 해석하는데, 그보다는 생생한 『논어』의 사상과 직접 관련지어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공자는 "인"이라는 덕성을 제자 누구에게도 쉽게 허여許與하지 않았다. "인"은 그에게 궁극적인 것 the Ultimate이며, 종국적인 것 the Final이며, 성스러운 것 the Holy 이다. 그래서 쉽게 허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느닷없이 또 이런 말을 한다: "인仁이 멀리 있다구? 내가 원하면 당장 나에게로 달려오는 것이 인仁인데!" 인은 지고한 동시에 내가 마음먹으면 또 당장에도 구현되는 것이다. 이러한 공자의 사상이 결국 돈오頓悟의 원형이 된 것이다. 노자는 말한다. "난이상성" 공자에게는 어려움과 수움, 멂과 가까움, 점차적인 달성과 갑작스러운 도달의 모든 논리가 양면이 모두 체화된 실존의 심연 속에서 융합되어 있는 것이다. "도불원인"은 "인원호재"와 같은 맥락에서 인지위도이원인"의 "원인"을 "사람을 멀리한다"로 번역하는 것은 오류이다. 원"은 타동사가 아닌 자동사적으로 쓰인 것이다. 즉 "도불원인"의 긍정태인 "도원인"의 축약형이다. "원인"은 "사람을 멀리한다"가 아니라 "사람에게서 멀리있다"는 뜻이 된다.
13-2. 詩云:'伐柯伐柯, 其則不遠' 執柯以伐柯, 睨而視之, 揂以爲遠. 故君子以人治人, 改而止. 시운: '벌가벌가, 기칙불원' 집가이벌가, 예이시지, 예이위원. 고군자이인치인, 개이지.
13-2. 시는 말한다. "도끼자루를 베네. 도끼자루를 베네. 그 벰의 법칙이 멀리있지 않아. 도끼가 꽂힌 도끼자루를 잡고 새 도끼잘를 만들려고 할 때에는 자기가 잡고 있는 도끼자루를 홀깃 보기만 해도 그 자루 만드는 법칙을 알 수 있는 것이어늘, 오히려 그 법칙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러므로 군자는 사람의 도리를 가지고서 사람을 다스릴 뿐이니, 사람이 스스로 깨달아 잘못을 고치기만 하면 더 이상 다스리려고 하지 않는다.
옥안 : 이것은 자사의 말이 아니라 공자의 말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독자들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사실 유가문헌에서 『시詩』의 인용이 나오기만 하면 좀 골치가 지끈거린다. 공자의 시대로부터 이미 『시詩』는 단장취의斷章取義적인 왜곡의 대상이 되었고, 인용자가 제멋대로의 의도에서 노래가사들의 맥락 지우고 있기 때문에 그 정확한 의미맥락을 파악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러나 유가문헌에서 자기들의 생각을 노래가사로써 정당화시키려는 노력은 매우 집요한 것이다. "노래"는 그들에게 있어서 사람의 노래인 동시에 신의 노래였다. 그것은 신적인 구너위를 갖는 것이다. 신양의 기자들이 구약을 인용하는 것이나 거의 비슷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 "벌가"의 노래는 『시경』 빈풍 「벌가」편 제2장 윗 두 구절이다. 모서에 이것을 주공을 찬미한 노래라고 한 것은 철없는 주석가의 부질없는 소견에 불과하다. 더구나 빈나라의 노래와 같은 국풍은 매우 평범한 민중의 노래로서 대부분 선남선녀의 사랑을 읊은 것이다. 요즈음의 유행가의 가사와 대차가 없다. 예나 지금이나 가요에서 청춘남녀의 사랑을 빼면 남는 것이 별로 없다. 이 「벌가」는 결혼은 중매쟁이를 통해서 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평범한 당대의 모랄을 표방하고 있는 노래이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구들에 장작불을 피웠기 때문에 도끼는 매우 중요한 기물이었다. 도끼로써 장작을 패는 광경은 집안마당의 가장 재미있는 놀이며 행사였다. 그런데 장작을 하도 많이 패다 보면 도끼구멍에서 자루가 잘 빠진다. 잘못하면 쇠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도망가면서 사람을 크게 다치게 할 수도 있다. 따라서 단단한 재질의 나무로써 도끼구멍에서 잘 빠지지 않도록 도끼자루를 만드는 것은 중요한 기술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도끼자루의 길이나 손에 잡히는 느낌이나 그 모든 것이 이상적인 촌수가 있었다. 이 노래는 아마도 이런 농촌의 습관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민요일 것이다. 그런데 새 도끼자루를 만드는 것도 기준의 도끼로 찍어 만드는 것이므로 그 새 자루의 법칙, 그 모범답안이 내가 들고 있는 도끼자루에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원래 빈풍의 시는 도끼를 가지고 새 도까지루를 만들 듯이 좋은 중매쟁이가 있어야 훌륭한 결혼의 매치가 성립한다는 것을 노래한 것이다. 아마도 도끼구멍에 자루를 끼운다는 것 자체가 묘한 성적 함의를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다. 『삼국유사』에는 원효스님이 요석 공주와 결혼할 때, "수허몰가부誰許沒柯斧"라는 시구를 발하는데, 그 뜻인즉 "누가 나에게 자루 없는 도끼를 허락하리오"라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요석 공주와의 결혼이 중매쟁이가 없는 결혼, 그러니까 공식적인 절차가 없는 결함이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 『중용』에서는 도끼자루를 만드는 법칙이 바로 내 손에 들려있는 도끼 속에 있다는 것을 암시함으로써 "도道가 사람에게서 멀리있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는 맥락에서 시구가 인용된 것이다. 따라서 군자가 사람을 다스리는 법칙도 사람 그 자체에 내재하고 있다. 이것은 곧 도끼주의 논의를 도의 내재주의의 심오한 철학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개이지改而止"도 해석상 어려움이 있으나, "이지而止"는 "이이而已"와 같은 의미로 새길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다스림治"이란 인간에 내재하는 법칙을 가지고서 인간을 다스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 궁극적 목표는 "개改" 즉 스스로 허물을 고치게 만듦일 "뿐이라는 것이다而已" 인간은 지배하는 데 다스림의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공자는 "허물이 있어도 고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허물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허물의 고침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이여야 한다. 다스림은 백성이 스스로를 교정해나가도록 만드는 것일 뿐이다. 개의 자발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개이지"를 "백성들이 스스로를 고치면 곧 다스림을 그만둔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다스림을 그친다"고 하는 것은 사상사적으로 볼 때, 매우 도가적인 래디칼리즘이 배어있는 발언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소극성"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세의 "보편성"이라고 하는 논리는 유가의 중심사상 중의 하나이며 다음 단락에서 그 메시지가 강렬하게 표명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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