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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지 있는 인문학

중용 제11장 11-1. 자왈:"소은행괴, 후세유술언, 오불위지의.

중용 제11장 11-1. 子曰: "素隱行怪, 後世有述焉, 吾弗爲之矣. 소은행괴, 후세유술언, 오불위지의

11-1.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숨어있는 편벽한 것들을 들쑤셔내고, 괴이한 행동을 하면, 후세에 조술祖述될 만큼 이름을 날릴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옥안 : 본 장의 해석에 관하여 어려 가지 다른 설이 있으나, 정현과 주희의 해석에 의거하여 평범하게 풀이하였다. "소은素隱"은 주희의 설대로 "색은索隱"으로 풀었다. 『한서』「예문지」에 실려있는 사고의 주가 이 절의 해석으로는 매우 적절하다.


주희장구:"소"는 『한서』「예문지」에 이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 문장에 의거하여 반드시 "색"으로 바꾸어야 한다(신선 10가를 논하는 곳에서 인용하고 있다). 대저 글자의 오류일 것이다. "색은행괴"라는 것은 은벽한 이치를 깊게 구하고, 궤이한 행동을 지나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하면 족히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도둑질할 수가 있기 때문에 후세에 혹시 그를 칭찬하여 조술하는 자가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지가 지나쳐 선을 택하지 아니 하는 것이요, 행이 지나쳐 중을 적용하지 아니 하는 것이요, 마땅히 강하지 말아야 할 경우에 강하게 사는 자이다. 성인이 어찌 이런 짓을 하실 수 있으리오!


장구옥안 : "술述"은 "기술한다," "조술祖述한다"의 뜻이니, 사람들이 그를 기리어 그 행동을 계승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11-2. 君子遵道而行, 半塗而廢, 吾弗能已矣.

11-2. 군자준도이행, 반도폐, 오불능이의. 


11-2. 군자가 길을 따라 가다가 중도에 그만두는 일이 있는데, 나는 중도에 그만두는 그런 짓은 할 수 없노라.


옥안 : "반도이폐"를 「옹야」10에 나오는 용법에 따라 긍정적인 맥락으로 풀이하는 설도 있다.


염구가 말하였다: "저는 선생님의 도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힘이 딸릴 뿐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참으로 힘이 딸리는 자는 중도라도 그만 둘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 너는 스스로

한계를 긋고 있을 뿐이니라."


이런 방식으로 해석하면 본 절은 다음과 같은 뜻이 된다.


군자는 정도를 따라 행하여야만 한다. 힘이 딸리어 중도에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정도를 행하

기를 포기하지 않겠노라.


그러나 주희의 해석이 더 평이하다. 구태여 주희의 설에 다 반기를 들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군자"의 의미를 가벼운 맥락에서 새길 수도 있다. 


주희장구 : "준도이행"이라는 것은 선을 택한다는 긍정적인 맥락이다. "반도이폐"는 힘이 부족하여 그만두는 것이다. 이것은 지知는 미침에 족하나 행이 못미치는 상황이며 앞 절과는 대비적으로 당연히 강해야 할 곳에서 강하지 못한 것이다. "이已"라는 것은 그친다는 뜻이다. 성인께서는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억지로 힘써서 감히 폐지하지 못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성무식 하시기 때문에 저절로 그칠 수 없는 바가 있는 것이다.


장구옥안: 『주자여류』(권130. 燾錄)에서 주희도 도와 성인은 두 개의 물사物事가 되어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말을 한다.


선생께서는 소동파의 동생 소자유(소철, 1039~1112)가 "성인을 배운다는 것은 도를 배우는 것만 못하

다"라고 언급한 것을 비판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다: 그는 도와 성인을 양개물사로 분리시켜 인식

했다. 그는 도라는 것이 몸뚱아리가 없는 성인이요, 성인은 또한 몸뚱아리를 갖춘 도일 뿐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학도는 곧 학성인이요, 학성인은 곧 학도일 뿐이다. 어찌 이 양자를 두 개의 물사로 본단

말인가!



도를 구현한 성인은 지성무식하여 저절로 그칠 수 없다고 말하는 주희의 견해에 관한 좋은 해설이다.


11-3. 君子依乎中庸, 遯世不見知而不悔, 唯聖者能之."

11-3. 군자의호중용, 둔세불견지이불회, 유성자능지



옥안 : 『논어』는 "인부지이불온"이라는 말에서 시작하여 "부지명, 무이위군자야"라는 말로 끝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고 있는 주제와 상통되는 주제가 전편에 흐르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주역』「문언」중, 건괘의 초구를 설명하는 말에 다음과 같은 인용구가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용의 덕성을 지니면서도 숨어있는 자이다. 그는 세상을 바꾸려고 하거나

세상에 따라 자신을 바꾸려고 하지도 않으며 또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세상을 은둔하고 살아도 마음에 언짢음이 없으며, 옳음을 인정받지 못해도 억울해 함이 없다. 세상

에 도가 있어 즐거운 마음이 생기면 나아가 행하고, 세상에 도가 없어 근심스러운 마음이 생기면 

물러나 미련을 버린다. 이와 같이 하여 확고하게 자신의 의지가 흔들리지 아니 하는 자, 그가 바로

잠룡이다."


군주의 권력을 제한하는 합리적인 제도를 만들지 아니 하고 "은둔의 철학"을 제시하는 유가의 정치사상은 매우 소극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인간세에 있어서 매우 근원적인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하나의 숨통일 수도 있다. 소인에게는 "은둔"이란 존재할 수 없다. 은둔이란 군자의 특권이다. 따라서 어떠한 폭군이라 할지라도 은둔만은 허용해야 한다. 은둔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처럼 무서운 폭력은 없다. 자사는 은둔을 중용의 실천이라는 내면적 덕성과 관련짓고 있다. 정치적 상황에 대한 불가피한 몰림이 아니라 내면의 덕성을 지키기 위한 적극적 선택으로서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중용을 실천하여 살면서도 세상에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매우 외로운 길이다. 의로운 삶을 살면서도 그 의로움을 공감받지 못한다는 것은 매우 울적한 길이다. 그러나 인정받으려고 바둥거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도덕적 자아에 대한 자신감이다. 자사는 칸트가 하나님의 존재나 영혼의 불멸에 대한 실천이성의 요청으로서 논리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문제를 매우 단순한 권면으로서 해결하고 있다. 그 권면은 인간의 "성"을 향한 발돋움을 의미하고 있다.


인간세의 선은 은둔자의 유대감에 의하여 지켜져 내려온 것이다. 21세기는 은둔과 출세가 동일한

역사의 장에서 동일한 파워를 가지면서 공존할 수 있는 다이내미즘을 가지고 있는 시대로가 말할 

수도 있다. 조선시대의 은자들이 지녔던 막강한 파워를 21세기 한국에서도 많은 은자들이 지녀야 

할 것이다.


주희장구 : "색은행괴"를 일삼지 아니 하면 중용의 실천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떠한 난관이 닥쳐도 중도에 폐하는 짓은 할 수 없는 그러한 군자는 세상에 운둔하여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아니 한다 할지라도 후회함이 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경지야말로 중용의 덕됨의 완성태라 할 수 있다. 지知의 극치, 인仁의 지고함, 용勇에 별로 의존치 아니 하고서도 여유작작할 수 있는 경지, 이것이 바로 우리 공자 선생님의 경지라 할 것이다. 그런데도 당신은 스스로 그러한 경지를 자처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냥 "오직 성자만이 능할 뿐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뿐이다.


여기까지가 제11장이다. 자사가 부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제1장의 뜻을 밝히고자 한 것은 여기에서 끝난다. 대저 이 『중용』이라는 책의 큰 구성을 살펴보면 지知·인仁·용勇이라는 삼달덕으로써 도에 들어가는 문을 삼았다. 그러므로 제2장부터 제11장까지의 앞머리에 대순과 안연과 자로의 일을 가지고 그 문을 밝혔다. 순은 지를 상징하고, 안연은 인을 상징하고, 자로는 용을 상징한다. 삼자 중에서 하나라도 폐하면 도에 도달하고 덕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제2장부터 제11장까지의 내용과 관련되는 보충설명은 제20장에 다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