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 제7장 7-1. 子曰: "人皆曰予知, 驅而納諸罟擭陷阱之中,而莫之知辟也. 人皆曰予知, 擇乎中庸, 而不能期月守也."
7-1.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를 보고 순임금처럼 지혜롭다고 말하는데, 나를 휘몰아 그물이나 덫이나 함정 속으로 빠뜨려도 나는 그것을 피하는 피하는 방법도 알지 못한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내가 지혜롭다고 말하는데 나는 중용을 택하여 지키려고 노력해도 불과 만 1개월을 지켜내지 못하는구나!"
옥안 : 『중용』을 많이 읽은 사람이라면 나의 번역을 읽고 경악하는 자가 많으리라고 생각한다. 이미 정현의 주에 "여지"의 "여"를 보통 사람들이 자칭하는 말로 규정하고, 앞의 "인개"의 "인"과 동격으로 간주하였고, 주희도 이러한 해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나의 해석을 생소하게 여길 것이 너무도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현은 오류를 범하였고, 주희는 그 오류를 답습하였다. 이 문장을 "자왈"로 시작된 문장이며, 여기 "여"는 공자 자신을 지칭한 것이다. 나의 번역은 이로의 여지가 있을 수 없는 정설이다. 우선 정현의 주를 한번 살펴보자!
"여"는 "아"이다. 범인들이 스스로를 일컬어 지혜롭다고 자부하나, 그물에 몰리게 되어도
피할 줄을 모른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스스로 자부하기를 중용을 택하여 실천한다고 말
하나 또한 오래 지속하지 못하니 실로 그들은 어리석고 항심이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본 장의 번역이 다음과 같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사람들이 모두 스스로 자부하기를 '나는 지혜롭다'고 말하나, 그
물이나 덫이나 함정 속으로 휘몰리어 빠지게 되어도 피할 줄을 알지 못하며, 사람들이 모
두 스스로 자부하기를 '나는 지혜롭다'고 말하나, 중용을 택하여 만 한 달도 지키지 못한다."
이러한 번역을 하는 자들의 심리에 놓은 거리씸은 위대한 공자가 중용을 1개월도 실천하지 못하는 인간일 수 없다는 공자에 대한 신성한 느낌의 표출에서 파생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앞 장의 순임금의 "대지"라는 주제를 계승하여, 공자 자신이 중용을 실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자신의 실존적 허약함 속에서 고백·독백함으로써 치열한 자계의 성찰과 타인에 대한 훈계를 동시에 발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얼마나 많이 외쳤던가: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치 아니 하고 도리어 내가 원치 아니 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도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19~24)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 "건짐"의 주체가 예스 그리수도이지만, 공자에게 있어서는 모든 인간이 자기를 자기 스스로 건져내야 할 뿐이다.
"여"를 타인으로 해석하면 공자를 숭상하는 것이 아니라 공자를 비난하는 꼴이 되고 만다. 이 면제는 어디까지나 공자의 말로써 기록된 것이다. 그런데 중용의 실천에 관하여, 타인을 나에게서 객화시키고 거기에다가 중용을 실천치 못하는 허약함을 다 전가시켜버리면, 공자와 인간은 서로가 타자화되어 서로를 비난하는 꼴이 되고 만다. 공자가 과연 자기는 중용을 잘 실천하고 사는데 범인들이 한 달도 못 지킨다고 비난할 수준의 인간일까? 여기 우리는 성과 속에 관한 근원적 이분이 사라지는 해탈인 공자의 모습을 상기해야 한다.
앞 장에서도 이미 인용했듯이 공자에 관하여 "지혜롭다"는 세평은 항종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세평을 공자는 항상 겸사로써 거부한다: "세인들이 나보고 박식하다고들 하는데, 과연 내가 뭘 좀 아는가? 나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공자는 "무지"를 자처하는 것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라고 묻고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라"라는 시몬 베드로의 대답을 기쁜 마음으로 허여하는 예수의 모습과는 역시 너무도 큰 차이가 있다(마 16:16)
「자한」2에 보면 달항당의 사람들이 공자를 일컬어 "박학"하나 "무소성명"이라 말했을 때도 그저 "말몰이꾼"이 되고 싶다고 소박하게 응수했을 뿐이고, 오나라의 태재가 공자라는 성인의 "다능"을 말했을 때도 공자는 "젊어서 천하게 살았기 때문에 비천한 일들에 잔재주가 많을 뿐"이라고 정직하고 담박하게 그 삶의 실상을 토로한다. 『중용』 12장에도 이런 말이 있다: "비록 성인이라 할지라도 또한 알지 못하는 바가 있다."
이 장의 주제는 내면적으로 공자가 안회의 탁월함을 허여하는 테마와 연결되어 있다. 공자는 독백한다: "안회는 말이다 그 마음이 석달 줄곧 인을 어기는 법이 없다."
「공야장」8에는 공자가자공 보고 "너와 아회, 나구 더 나으냐?"하고 매우 코믹한 비교의 언사를 발한다. 그러자 자공이 대답한다: "제가 어찌 감히 안회를 넘나보겠나이까?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 뿐이옵니다." 이때 공자는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멘트를 날린다: "그래, 너는 안회만 같지 못하다."
공자는 인을, 중용르 삼 개월 동안 한 치의 어김도 없이 지켜내는 안회 앞에 무릎을 꿇을 줄 안다: "오 안회여! 그대는 3개월, 아니 그 이상을 지나도록 한결같이 중용을 택하여 실천하건만, 나는 한 달을 지키지 못하는구나! 오~ 나는 곤요로운 자로다!"
공자는 말한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절로 아는 자가 아니로다! 옛 것을 좋아하고, 민첩하게 구하여 아는 자일 뿐이로다." 공자는 "호고" "민구"할 뿐이다. 끊임없이 중용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자일 뿐이다. 공자는 또 말한다: "성과 인에 관해서는 내 어찌 감히 자처할 수 있으리오! 그러나 도를 실천함에 싫증내지 아니 하고, 사람을 가르치는 데 게으름이 없는 데는 자신있다 말하리라." 그러자 공서화가 옆에서 한마디: "선생님, 바로 그 점이저희 제자들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오니이다."
이러한 정직한 교감, 소탈한 삶의 진실의 고백, 이런 것이야말로 공자를 위한 성인으로 만든 소이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술이」17에 또 이와 같은 공자님의 말씀이 있다: "배움이란 영 따라잡지 못할 듯, 그런데 따라잡아도 따라잡아도 또 놓치고 말 듯." 공자가 얼마나 끊임없이 자성과 자계의 인간이었는지, 얼마나 학문 앞에 자신의 모습을 겸손하게 그리고 있었는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도마복음』 속에 예수도 이와 같이 말한다: "누군가 모든 것을 안다 해도, 자기를 모르면, 모든 것을 모르는 것이다." 자기를 안다는 것은 자기의 불완전성을 자각하는 것이다. 자기의 불완전성을 자각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것이며, 끊임없이 구하는 것이다(Th. 2): "구하는 자들이여! 찾을 때까지 구함을 그치지 말지어다. 찾았을 때 너는 고통스러우리라. 고통스러울 때 너는 경이로우리라. 그리하면 너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리라."(Th.2). 『중용』의 사상과 상통하는 정신을 담고있는 로기온 자료들이다.
"휘몰려 함정에 빠지게 되어도 나는 피할 줄을 알지 못했다."함은 공자의 생애에서 게속 발견되는 상황이다. 삼환과 대결하다가 노나라를 떠나게 되는 과정이나, 광에서 구류당한 것, 송나라의 사마 환퇴에게 죽임을 당할 뻔 했던 일, 그리고 그 유명한 "진채지액" 등등의 사건은 그러한 공자의 어쩔 수 없었던 비운의 상황을 잘 말해준다. 그 모습이 얼마나 처량했으면 "상가지구"라는 말을 들었겠는가? 이런 속된 표현을 들어도 공자는 "그래! 그래! 그렇구말구. 나는 정말 상가집 개처럼 처량한 모습이었지!"하고 수긍하면서 미소지을 뿐이다.
"막지지피"의 "지"는 "피"의 목적어이며 그것도 도치되어 "막"이라는 부정사 뒤로 붙은 것이다. "기월"은 만 한 달의 뜻이다. "기"라는 것은 달의 모습이 다시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오기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
주희옥안 : "여지"의 "지"는 거성이다. "罟"는 "고"라고 발음한다. "擭"은 호화胡化 반이다(※ "반反"이란 반절이라는 음의 구성방식이다. 앞 글자에서 성모를 뒷 글자에서 운모를 취한다. 그러면 호환 반이라는 것은 "화"가 된다. 조선시대 때 언해를 보면 언해를 보면 보통 "화"라고 읽었는데, 지금은 대체로 "확"이라 읽는다.) "阱"은 재성반이다. "辟"은 "피避"와 같다. "期"는 거지居之 반이다. "고"는 그물이다. "확"은 덫이다. "함정"은 동물을 빠뜨리는 구덩이이다. 이 삼자는 모두 금수를 가리워 잡는 장치들이다. "택호중용"이라는 것은, 온갖 이치의 가능성을 변별해내어, 소위 중용이라는 가치를 구하는 것이니, 이것은 곧 윗 장에서 말한 순임금의 "호문" "용중"의 일에 해당되는 것이다. "기월"이란 한 달을 뺑 돌아 제자리에 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에게 화가 미친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피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우매함을 말씀하시어, 중용을 택하기는 하되 그것을 지키지는 못하는 상황에 비유하시었으니, 이것은 모두 참된 앎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장구옥안 : 주희는 정현이 읽는 방식으로 읽고 있다. 주희가 이렇게 읽는 바람에 모두 그렇게 읽어왔다. 고주와 신주가 합치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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