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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지 있는 인문학

중용 제6장 2 호문의 의미에 대하여

중용 제6장 2 호문의 의미에 대하여 계속



공자는 대제에 관한 지식이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객관적 사례들에 관한 정보에 불과했다. 곡부의 태묘에서 행하는 제식에 관해서는 공자는 구체적 체험이 없었다. 그러므로 신임 장관이 된 그로서는 "묻는 것"이 너무도 당연했다. 자기를 비우고, 아는 체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는 것이 없는 것처럼 그 상황상황에서 묻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위대한 지식의 획득방법인 것이다. 모든 지식은 반드시 살아있는 시중의 지식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죽은 지식은 도서관의 서가에 얼마든지 꽂혀있다. 우리는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삶의 상황 속에서 우리의 앎 그 자체를 끊임없이 되물어야 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공자의 가장 큰 차이점은 소크라테스의 앎의 추구를 "신탁"으로부터 출발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공자에게는 그러한 신탁의 전제가 없다. "너 자신을 알라"를 신탁의 명제로 전제하고 있질 않다. 공자에게서 문제되는 것은 "궁극적 앎"이 아니라 "삶의 상황"이다. 상황의 매순간에 닥치는 삶의 문제는 해결이다. 소크라테스는 온전한 지식은 오직 신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가 하는 작업이란 결국 인간의 지혜가 불완전한 것이라는 사실(전혀 가치가 없다고까지 말한다)을 폭로하기 위한 것이다. But the truth of the matter, gentlemen, is pretty certainly this, that real wisdom is the property of God, and this oracle is his way of telling us that human wisdom has little or no value.(Apology 34a).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모든 개념에 대한 반증만을 제시할 뿐, 그 궁극적 정의나 의미에 관한 최종적 단안은 항상 보류한다. "무지의 자각"의 과정만이 소중할 뿐이다. 이것이 서양의 변증법의 역사를 이룩했을지는 모르나 이런 방식의 지식추구는 그 전체가 하나의 신화적 패키지 속에 묶여있다. 지식은 "완전성"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 것이다. 동방인들은 완전한 지혜를 말하지 않는다. 완전한 지혜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신화적 픽션이다. 자사의 "호문"의 철학은 서양철학이 20세기의 프래그머티즘의 수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호문"다음에 나오는 구절이 "호찰이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호찰이언"이야말로 "호문"보다도 더 중용의 정신을 드러내는 결정적 문구라고 생각한다. 자사는 "ㅎ문이호찰이언"을 같이 말할 때는 "호찰이언"에 더 중점을 두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호문"의 정신은 "호찰이언"에서 구현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교의 "호문"이 서양의 변증법과은 다른 정신을 표방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언"이란 "가까운 말"이라는 뜻이다. "이"는 "근"의 고자라고 말할 수 있다. 같은 『중용』구절에 "행원필자이"라는 말이 있다. 먼 곳을 가려고 해도 반드시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 "등고필자비"높은 곳을 오르려 해도 반드시 낮은 곳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논어』「옹야」28에 "인지방"(인을 실천하는 방법)을 논하는데 능근취비"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여기서"비"라고 하는 것은 "비유적으로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깨달음enlightenment" "공감sympathy"을 의미한다. 즉 삶의 가까운 현실 속에서 깨달음을 취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이나 플라톤의 대화는 모두 지고의 이상이나 선을 향한 인간의 개념적 추구이다. 그러나 여기 "능군취비"나 "호찰이언"이란 일상성·항상성의 추구이다. 나의 삶의 가까운 일상 속에서 항상스러운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비근한 말을 살피기를 좋아한다"는 뜻 속의 "비근한 말"이란 곧 비근한 삶 속에서 나에게 깨우침을 주는 언어적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다. 말은 곧 깨우침이다. 「자장」6에도 "절실하게 붇고 가까운 데서 생각하라"라는 말이 있는데 모두 같은 의미이다. 이 말에 기초하여 주희는 『근사록近思錄』을 지었다. 어찌 절문하고 근사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논하고 천상의 구원을 논할 수 있으리오! 서양철학이 아무리 지고한 철리를 말한다해도 철학으러써 과학적 발명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과학철학을 모른다고 위대한 과학자가 아니 되는 것은 아니다. 세계를 물리적으로변혁시켜 나가는 것은 결국 과학과 기술의 진보이다. 철학이 끊임없이 인간의 일상적 현실을 관리하는 능력을 상실한다면 극서은 철학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맹자』「공손추」상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우임금은 일상생활 속에서 좋은 말을 들으면 곧 절하시었다. 대순임금께서는 이보다도 더 위대한 측면이 있으셨으니, 선을 항상 사람들과 더불어 향유하시었으며 자기를 비우시고 남을 따르시며, 남에게서 배울 것이 있으면 취하여 선을 실천하는 것을 낙으로 삼으시었다. 밭갈고 곡식 심고 질그릇 굽고 고기잡을 때로부터 황제가 됨에 이르기까지 남에게서 겸손하게 배우지 아니 함이 없으셨다. 남에게서 취하여 선을 실천한다는 것은 남이 선을 행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에게 있어서 타인이 선을 행하도록 도와주는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이라곤 없다. 


이것은 순임금이 얼마나 철저히 자기를 비울 줄 아는 민주적인 리더였는가를 말해주는 덕목이다. 본 6장과 상통하는 정신을 진술해놓고 있는 것이다. 또 순임금의 호학, 호문의 정신을 나타내는 매우 극단적인 다음과 같은 표현이 「진심」상16에 실려있다:


                        순임금께서 깊은 산중에 거처하실 적에는 나무와 돌과 함께 거처하시었고 

                        또 사슴과 멧돼지와 함께 노니셨으니, 깊은 산 속의 야인과 다르다고 말할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한 가닥이라도 사람의 선행을 보시게 되면 그것을 

                        배우려는 마음의 쏠림이 마치 양자강과 황하의 둑방이 터진 듯이 패연하여 

                        그 어떤 것도 능히 막을 길이 없었다. 바로 이런 점이 보통 야인과 달랐기 

                        때문에 제위에까지 오르시게 된 것이다.


 선에 쏠리는 호학의 정신을 "양자강과 황하의 둑방이 터진 듯 패연하다"라고 기술한 것은 참으로 위대한 문학적 표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컨트가 정언명령의 형식으로 이성적으로 정칙화하려는 그 압도적인 명제를 성인의 본보기를 통하여 정감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자사의 사상은 공자의 호학 정신을 계승하여 맹자에 영향을 준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隱惡而揚善"을 "은약이양선"이라고 읽으면 안된다. 그렇게 되면 마치 "선"과 "악"이 대립하는 것으로서 실체화되는 위험성을 초래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선진문헌에 있어서 선과 악이라는 실체적 개념이 대립의 짝으로서 나타나는 경우는 전무하다. 이것은 물론 "은오이양선"이라고 읽어야 한다.


"오"는 "악the evil"이 아니라 "추함the ugly"이다. 악은 부정적 가치이지만 추는 부정적 가치가 아니다. 사람이 못생겼다고 악한 것은 아니다. 추한 행동도 때로는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할 수 도 있다. 그리고 여기 "선"은 규범윤리적으로 규정된 선이라는 덕목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정감상의 수용이다. 즉 "좋음"이다. 많은 사람이 "隱惡而陽善"을 "은악이양선"이라고 읽고, 이를 번역하기를 "악은 숨겨주고 선을 드러낸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수닝 위선자들만 양산하는 지도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악한 행동을 하는 자들을 그 악을 숨겨주고 선만을 드러낸다면 그들의 위선적 측면만을 강조하는 꼴이 된다. "위선"이란 이런 방식으로 인위적으로 조적된 선이라는 뜻이다.


여기 "은"이라는 타동사는 "숨겨준다"로 번역하면 곤란하다. 그것은 "언偃"의 가차자이며 "눕힌다" "자빠뜨린다" "쉬게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억抑"과도 상통한다. "누른다"의 뜻이다. 그러니까 "隱惡"은 "은오"로 읽어야 하며, 그 뜻은 사람의 추한 면을 부각시키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존재의 배면에 누워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선"은 단순한 "좋음"이다. 나는 "은오이양선"을 "사람들의 추한 면은 덮어주시고 좋은 면은 잘 드러내주시었다"라고 번역했다. 선악의 이원론이 배제되는 것이다.


다음 이 6장의 메시지를 가장 위대하게 만드는 명언은 "집기양단, 용기중어민"이라는 명제이다. 보통 생각없는 사람ㄷ르은 양단"과 "중"이라는 말을 대비로 인하여 곧 수학적은 직선상의 양극가에 대한 미들을 연항상하기 쉽다. "중"은 결코 양극가의 중간치를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의 행위의 가치는 결코 그러한 방식으로 서열화될 수가 없다. 흑과 백의 양단에 대하여 회색일 수는 없는 것이고, 좌파·우파에 대하여 중도파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중간치는 아무 의미없이 위기만 모면하는 기회주의자, 중도를 가장하는 위군자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논어』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공자의 말씀을 한번 살펴보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세인들이 나보고 박식하다고들 하는데 

                           과연 내가 뭘 좀 아는가? 나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비천한 아해

                           라도 나에게 질문을 하면, 비록 그것이 골빈 듯한 멍청한 질문이라

                           할지라도, 나는 반드시 그 양단의 논리를 다 꺼내어 그가 납득할 

                           수 있도록, 있는 성의를 다해 자세히 말해준다. 이래서 내가 좀 아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지."


아무리 비천한 인간이 아무리 골빈 듯한 질문을 해도 나는 그 양단을 고한다. 여기 "고"라는 것은 "두드린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질문의 주제가 발생했을 때 그 질문에 막바로 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질문의 주제에 관련된 모든 극단적 상황을 탐문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문담의 과정일 수도 있고, 내면의 사색의 과정일 수도 있다. 따라서 "양단"이라는 것은 그 주제를 둘러싼 모든 가능한 극단적 문제제기의 상황이다. 그리고 그 상황에 대한 탐문을 철저히 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중"은 이러한 탐문의 철저한 과정을 통하여 스스로 우러나는 어떤 동적 평형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소크라테스의 문답법과도 같은 변증법적 과정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변증법의 문제는 항상 그 추구하는 논리의 방향성이 그 논리 외적인 목표를 향해있다. "지고의 선이 무엇이나?" "완전한 정의가 무엇이나?" "사랑이 무엇이냐?" 이런 질문은 우리의 삶의 내재적인 질감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다. 그 주어지는 상황상황 속에서 그 양단을 두드리며 철저히 추구할때 드러나는 "중"은 변증법적 이념이 아니라 우리 삶의 일상적 프락시스다. 그것은 결코 변증의 대상이 아니다. 좁은 가치관 속의 합목적성은 항상 저열한 변증을 생산한다.


최후의 "기사이위순호"에서 "사이"는 지금 쓰는 "시이"와 같은 용법이다. "그러하기 때문에"의 뜻이다. 여기 "위순"이라는 말은 "역사적으로 순이라는 인물이 순임금이 된 까닭" 혹은 "순임금이 순임금이 된 까닭," 즉 내면적 덕성의 명시상부함을 나타내는 말일 수도 있지만, 아주 단순하게 "순"이라는 "시법"이나 그 이름의 풀이에 관련된 언급일 수도 있다. 정현은 시호의 의미로 풀었다: "그 덕이 이와 같기 때문에 '순'이라고 호한 것인데 순은 '충'의 뜻이 있다.


"순"이라는 글자의 원의는 "순"이며 "목근" 즉 무궁화나무를 의미한다. 그 고음은 "준俊" "준埈" "윤允" "충充"과 같은 계열로 간주된다. 준수하다, 뛰어나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위순"은 "뛰어나다는 의미의 순으로 불리게 된 까닭"이라는 뜻이 된다.


주희옥안 : "지"는 거성이다. "여"는 평성이다. "호"는 거성이다. 순임금께서 크게 지혜로운 자가 되신 이유는, 자기 스스로 가지고 있는 지식을 독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겸손하게 묻고 그들로부터 항상 지식을 취하셨기 때문인 것이다. "이언"이라고 하는 것은 천근한 말인데, 천근함에도 불구하고 순임금은 반드시 살피시었으니, 천근한 가운데서도 선함을 놓침이 없으셨다는 것을 가려주고 드러내지 않으셨으며, 그 선한 것은 널리 전파하여 은닉하지 않으셨다. 그 광대하고 광명하심이 또한 이와 같으니, 누구인들 그에게 말을 할 때에 안심하고 선으로써 고하려 하지 않겠느뇨? "양단"이란 중론이 같지 않음의 극치를 일컫는 것이다. 대저 모든 사물이라는 것은 반드시 그 양단이 있게 마련이다. 모든 사태에는 대소, 후박과도 같은 상대적 극단이 있다. 선이라고 하지만, 그 선한 가운데서도 또한 그 양단을 잡아서 헤아림으로써 그 중을 취한 연후에야 비로소 그것을 백성의 삶에 적용하시니, 그 선택하심이 모든 상황을 살핀 것이어서 오류가 없고, 또 그것이 실행되는 것도 지극히 순조롭고 정당한 것이다. 그러니 나의 내면 속에 있는 저울의 눈금이 정밀하여 오차가 없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 감히 누가 이러한 경지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그 지가 과·불급이 없는 까닭이요, 도가 행하여질 수 있는 까닭이다. 


장구옥안 : 주희의 해설은 훌륭하다. 내가 말한 "동적 평형"의 논리를 흡수한 방식으로 "중"의 상황성을 이해하고 있다. "양단"을 "중론부동지극치"라 해설한 것도 어떤 수학적 미들을 전제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제6장은 전체적으로 "중용"의 뜻을 밝히고 유교적 사유방법의 특징을 깨우치는데 매우 간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예기』「단궁」하에 "직정이경행"하는 것은 "융적지도"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선의 실천에 있어서 열광적인 이상주의를 경게하는 말이다. 정을 체크함이 없이 직선적으로 발산시키고, 또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오랑캐나 하는 짓이라는 뜻이다. 역시 예라는 것은 모든 상황을 고려해가면서 수렴하고 주저하면서 시중을 얻는 냉정한 태도를 더 높은 가치로 삼는다는 뜻이다. 절제가 없는 직정경행의 인간은 유가적 사유에서는 항상 경계의 대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