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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지 있는 인문학

중용 제 5장 5-1. 자왈:"도기불행의부!"

중용 제5장 5-1. 子曰: "道其不行矣夫!" 자왈:"도기불행의부!"

                                 

5-1.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 "아~ 진실로 도가 행하여지질 않는구나!"


옥안 : 여기 "의"는 단정을 나타내며 "부"는 영탄의 기분을 나타내고 있다. 것은 실로 공자의 내며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좌절감, 그 모든 희망이 봉쇄된 절망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공자가 어쩔 줄 모르고 배회하는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과도 같은 풍부한 감정이 노출되어 있는 표현인 것이다. 주희가 이 짤막한 한마디를 한 장으로 독립시킨 것은 참으로 탁월한 선택이라 할 것이다. 제4장의 첫머리에 이미 "도지불행"을 말했고, 그 끄트머리에 "맛을 아는 이가 드물다"는 탄식을 발한 후에 또다시 여기 "도가불힝의부"를 반복적으로 이야기한 것은, 이 "중용"이라는 가시의 배면에 얼마나 깊은 탄식을 깔려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자사는 이러한 공자말씀의 인용방식을 통하여 "중용"의 적통성과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주희는 「서」의 첫머리에서 자사자께서 도학의 실전을 우려하여 『중용』을 지었다고 말했다. 즉 『중용』은 성인의 우환의 산물인 것이다. 예수도 율법이 지배하는 세계에 대한 우환의식 속에서 그의 공생에를 출발시켰을 것이다.


사실 여기 제5장의 표현은 『논어』「공야장」6의 공자독백과 상통한다: "도불행, 승부부우해. 아~ 나의 도가 실현되지를 않는구나! 뗏목을 타고 바다에 둥둥 떠있고 싶다." 이것도 강렬한 도덕적 이상을 추구한 공자의 구극적 좌절감이 기약없는 혼돈의 카오스에 방치되는 것과도 같은 공상의 여백으로 전환되어 표출된 것이다.


주희장구 : "夫"는 "부扶"라고 발음한다. 도가 밝혀지질 않기 때문에 행하여 질 수가 없는 것이다.


장구옥안 : 앞 장의 끝말을 받아서 재차 강조한 것으로 주희는 해석하고 있다. 맛을 아는 이가 드물다. 그래서 도는 밝혀지기가 어렵다. 그래서 도가 행하여지질 않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제5장이다. 이 장은 제4장을 이어 도가 행하여지고 있지 않다고 하는 그 단서를 들어 다음 장인 제6장의 뜻을 일으키고 있다.


장구옥안 : 제5장이 독립된 장으로 분장된 이유를 주희가 밝힌 것이다. 즉 제4장이 "도지불행"을 말했는데 제5장 또한 "도기불행"을 말하여 제4장의 분위기를 극대화시켰다. 그렇게 함으로써 제장은 제6장의 서론격이 되었는데, 제6장은 그와 대조적으로 도가 행하여지고 있는 상황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4장에서 "맛을 아는 이가 없다"고 했는데 제6장에서는 그 "맛을 안다"고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대비적 관계의 두장 사이에 "도가 행하여지질 않고 있다"는 깊은 탄식을 다시 한 번 삽입시킨 것이라고 주희는 해설하고 있는 것이다.


 중용 제6장 6-1. 子曰: "舜其大知也與! 舜好問而好察邇言, 隱惡而揚善, 執其兩端, 用其中於民, 其斯以爲舜乎!"순기대지야여! 순호문이호찰이언, 은악이양선, 집기양단, 용기중어민, 기사이위순호!"


6-1.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순임금은 크게 지혜로운신 분이실진저! 순임금께서는 무엇이든지 묻기를 좋아하셨고 비근한 말들을 살피기를 좋아하셨다. 사람들의 추한 면은 덮어주시고 좋은 면을 잘 드러내주시었다. 어느 사황이든지 그 양극단을 모두 고려하시어 그 중을 백성에게 적용하시었다. 이것이 바로 그 분께서 순이 되신 까닭이로다!"


옥안 : 제2장부터 제5장까지는 중용의 위대함을 찬탄하기는 하였으나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그에 못미치고 있는 부정적 사태에 대한 경고가 주제를 이루었다. 제4장은 도의 "불행"과 "불명"을 말하였고 제5장은 도가 행하여지고 있지 않고 있는 현실에 대한 깊은 절망의 탄식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제6장은 도가 행하여지고 있는 긍정적 사례를 말한다. 부정에서 긍정으로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도는 과연 어떻게 행하여지고 있고 어떻게 밝혀지고 있는 것일까? 도행, 도명의 사례는 공자는 순이라는 탁월한 지도자의 대지大知를 들어 운운하고 있는 것이다. 도는 정치적 권력으로 행하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써만 행하여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작은 지혜가 아니라 "큰 지혜"이다(고문에서는 알 지知자와 지혜 지智자의 구분이 없다. 앎과 지혜는 하나다). 그렇다면 "큰 지혜란 무엇인가? 우선 순임금은 정치권력을 혈연으로써 자동적으로 승계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혈연과는 무관하게 실력을 인정받아 천거방식에 의해 발탁된 사람이다. 그의 실력은 당대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가장 중용한 덕목이었던 "효"의 실천자라는 사실에 의하여 입증된 실력이었다. 이 실력을 검증하기 위한 수단으로 아리러니컬하게도 제요는 자기의 아름다운 두 딸을 동시에 순에게 시집보낸다. 이것은 고대인들이 인간세를 다스리는 방편에 관해 얼마나 정을 중시했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증이다. 순이 두 여자를 동시에 화목하게 부인으로서 거느릴 수 있다면 한 제국도 너끈히 다스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실력본위의 권력승계방식을 "선양"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우임금 이후로 실천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의 영원한 정치적 이상으로 중극인들의 심상 속에 자리잡았다.


"대지"란 무엇인가? "대지"도 역시 "앎의 방식"에 관한 것이다. 어떻게 아는 것인가? 큰 지혜란 자기 스스로 큰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지 않는 것이 그 제1의 조건이다. 자기가 아는 것을 남에게 하달하거나 명령하거나 강요하는 일방적 방식은 우선 지혜의 조건이 될 수 없다. 모든 인간의 지식은 인간 개개인이 스스로 깨우쳐가는 것이다. 위대한 지헤의 소유자는 오직 인간이 스스로 깨우쳐가는 것이다. 위대한 지혜의 소유자는 오직 인간이 스스로 깨우쳐가는 과정에 도움을 줄 뿐이다. 결코 지식은 남에게 전수받는 것이 아니다. 칸트도 철학을 "필로소피"라는 명사로 말하지 않았고, 오직 "필로쇺렌, 철학화함"이라는 동사, 즉 이성의 재능을 활용하는 행위로서만 이야기했다. 소크라테스는 『변론Apologia』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누구의 스승으로서 자처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젊은이이든 나이든 사람이든 누구든지 내가 말하는 것을 듣고자 하거나 내가 신탁의 사명을 실천하는 일에 관하여 듣고자 한다면, 나는 누구에게도 그 기회를 허락하는 것을 거절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돈을 맏으면 문답에 응하고, 돈을 받지 못하면 문답에 응하지 않는 그런 짓을 한 적이 없으며, 부유한 사람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가리지 않고 똑같이 그들의 질문에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내 말을 듣기를 원하거나 나의 질문에 대잡하려는 자세만 있다면 항상 기꺼이 대화를 나누었지요. 그리고 내가 대화를 나눈 사람들 중에 누군가가 훌륭한 사람이 되거나 악한 사람이 되거나 하는 것에 관하여 그 책임을 나에게 묻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어느 누구에게도 특정한 지식을 전수한다든가, 가르치을 약속한다든가 하는 짓을 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함께 공개적으로 들을 수 없었던 지식을 나로부터 배웠다든가 나로부터 들었다고 주장한다면, 여러분들은 그가 쌩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확신해도 좋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