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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지 있는 인문학

중용 제3장 3-1. 자왈:"중용기지의호! 민양능급의!"

중용 제3장 3-1. 子曰 : "中庸其至矣乎! 民鲜能久矣!"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중용이여, 참으로 지극하도다! 아~ 사람들이 거의 그 지극한 중용의 덕을 지속적으로 실천하지 못하는구나!"


옥안 : "지의호"의 "의"는 강한 단정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렇지만 감탄의 의미 또한 내포하고 있다. 그 뒤에 붙어있는 "호"도 감탄을 나타내는 말이며 의문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다. 그것을 "지극하지 아니 한가?" 식으로 반어적 용법으로 해석하면 아니 된다.


이 장의 내용은 『논어』「옹야 27에도 나오고 있다. 자왈:"中庸其至矣乎! 民鲜能久矣" 「옹야」에는 "중용" 다음에 "지위덕야" 4 글자가 더 있고, 또 『중용』 텍스트의 "민선능구의" 구문 중에서 "능"자가 빠져있다. 이 두 파편을 비교해보면 역시 「옹야」쪽이 더 오리지날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원래 "중용의 덕됨"에 관하여 공자가 언급한 것을 자사가 인용하면서 "중용"이라는 주제를 선명하게 부각시키기 위하여 "덕됨"을 빼버린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리고 "구"의 의미를 강화하기 위하여 "능"을 첨가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 "민선능구의"라는 구문을 어떻게 해석하냐에 관한 것이다. 『논어』에 있는 "민선구의"에 관하여 하안이 다음과 같은 주해를 달음으로써 문제가 매우 복잡하게 되었다: "용庸이란 상常의 뜻이다. 중화는 항상 사람들이 행할 수 있는 덕인 것이다. 그런데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선왕의 도가 폐하여지자 이 도를 능히 행하는 사람들이 드물기 된 지가 너무 오래되어 버렸다. 그것은 오늘에 이르러서 비로소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하안의 주에 형병이 같은 논조의 자세한 소疏를 달았고 또 정자가 그것을 계승하는 바람에 주희가 어색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논조로 모든 것을 해석해 버렸다. 그 때문에 오늘날까지 그러한 식의 해석이 판을 치게 되었다. 그러나 "민선구의"라는 구문에서 "민선"에서 끊고 "구의"를 시간의 추이로 독립시켜 해석하는 것은 도무지 어색하다. "구"는 본동사가 될 수밖에 없고 "선"은 그 본동사를 수식하는 정도부사나 부정부사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군 주제가 되고 있는 "중용"의 덕을 "상"이라고 규정한다면, 이 항상성은 지구성과 관련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민선구의"는 당연히 "백성들이 중용을 오래 지속하여 실천하지 못하는구나!"가 되어야 한다. 다산 정약용도 "중용을 실천하는 백성이 드문 지가 오래되었도다"라고 풀이하는 것은 도무지 문법적으로도 자연스럽지 못한 어기지 해석이라고 비판한다. 그것은 실상 『중용』에서 말하는 "만 한 달도 지켜내지 못한다."라는 것과 같은 표현일 뿐이라고 못박는다.


『중용』의 이 구절도 마찬가지로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정자는 이 구문에 대하여 이와 같은 해석을 내렸다: "세상의 가르침이 쇠퇴한 이래 백성들은 이 중용을 분발하여 실천하려고 하지를 않았다. 그래서 이 덕을 간직한 이가 적은 지가 오래되었다." 주희는 이러한 정자의 해석을 그대로 계승하여 "중용의 덕에 능한 사람이 적은 지가 너무 오래되었구나!"라는 탄식으로 푼다. 중용의 위대성에 대한 찬미와 더불어 중용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세태에 대한 개탄이 대비되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능구"를 하나의 동사단위로 보지 않고, "능"과 "구" 사이를 단절시킨다는 것은 문법상으로 도저히 용납하기 어렵다. 주희의 해석과는 달리 정현의 고주는 이 구문에 관하여 매우 정확한 해석을 내렸다.


             "선"은 드물다는 뜻이다. 중용의 도됨이 지극히 아름답다는 것을 찬탄하였고, 되돌아보건대

              사람들이 거의 중용을 오래 실천하지 못한다고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드물다"의 주어가 사람이 아니라 "오랜 실천"이 되는 것이다(People rarely practice it long). "민선능구의"는 당연히 정현의 해석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선능구의"라는 구문의 문법구조는 다음 장에 나오는 "선능지미야"와도 동일한 구조를 과시하는 것이다. "선"은 부정부사이며 "능"은 조동사이며 다음에 오는 것이 본동사가 된다. 그렇

게 되면 "민선능구의"는 "사람들이 그 지극한 도를 일상적으로 실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거의 오래 지속적으로 실천하지 못한다"는 뜻이 된다.


다산은 "용"의 글자됨이 원래 상의 뜻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면 군자의 진덕수업은 "능히 항상스럽게 오래 지속할 수 있음"을 귀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주역』에도 천지의 도는 항구하여 그침이 없음을 말했고, 또 천행이 건하여 군자는 자강불식해야 하낟고 말했다. 또 항 괘의 구이 효사 소상에는 "중용에 능히 지속할 수 있음으로써 후회를 없게 할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이런 등등의 사례로 미루어 볼 때 중용은 오로지 "능구"(오래 지속할 수 있음)을 덕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희의 설은 틀렸다고 반박한다(다산은 주희를 직접 비판하지 않고 하안을 반박하면서 주희를 비판한다.). 앞서 말했듯이 자사의 핵심사상은 "지속" 즉 구"에 있다. "능"은 "구"를 수식하는 조동사이며 "선"은 그 "능구"를 부정하는 부사이다. 이 자사의 핵심적 사상개념을 단순한 시대에 개탄을 푸는 것은 『중용』 텍스트의 가치를 크게 떨어뜨리는 것이다. 변화 속에서 중용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지극한 가치이며 그것이야말로 후반에 등장하는 성誠의 테마가 되는 것이다. 


제2장에서는 군자의 중용과 소인의 중용의 대비를 말하고 제4장에서 중용이라는 덕성의 가장 중요한 의미 내용인 과·불급의 본론적인 이야기가 나오는 그 사이에 중용의 지극함과 그것을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탄식을 끼워넣은 것은 자사의 탁월한 편집감각이라고 볼 수가 있다. 주희가 이 파편을 한 장으로 독립시킨 것도 너무나 정당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중용을 지속적으로 실천함이 드물다는 탄식은 다음 장인 제4장·제5장의 "도지불행"과 내용적으로 연결되고 있으며, 또 제7장의 "불능기월수"라는 공자의 탄식으로써 다시 강렬하게 부각되고 있다.


주희장구: "선"은 상성이다. 이 다음부터 나오는 "선"의 용례는 다 마찬가지이다. 과하면 중을 잃고, 불급하면 중에 도달치 못한다. 그러하기 때문에 중용의 덕이야말로 궁극적인 것, 지극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 중용이라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천명으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에 애당초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단지 세교가 쇠퇴하여 백성들이 관심을 가지고 행하지를 않기 때문에, 중용에 능한 사람이 적은 지가 지금 이미 오래되었다라고 탄식한 것이다. 『논어』에는 "능"자가 없다.


장구옥안:『혹문』에 보면 혹자가 "민선능구"는 중용의 덕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능구"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며 주희처럼 "능"과 "구"사이를 단절시킬 수 없다고 반론을 제기하고, 하문의 "불능기월수"(제7장)로써도 정현주의 입장이 증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주희는 이러한 반론에 대하여 본 장은 제2장의 "소인반중용"이라는 테마를 계승하여 그러한 시대적 상황을 범론한 것이므로 갑자기 "중용의 덕의 지속"의 문제가 튀어나오는 것은 어색하고 "중용에 능한 사람이 드문드문 지가 오래되었다"고 하는 세태에 대한 한탄으로 풀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강변한다. 그리고 제7장은 중용을 택하여 실천하려는 자에 대한 멘트이기 때문에 맥락이 다르다고 말한다. 즉 제3장과 제7장은 각기 다른 테마를 발명하고 있으므로, 제7장에 의거하여 본 장의 뜻을 규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반박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희가 자신의 해석이 어색한 해석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자의식의 반영이다. 제3장의 "능구"라는 태마가 제7장에 가서 더 강렬하게 발전적으로 나타난다고 해서 어색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주희의 주석 중에서 내 가슴에 아프게 와닿는 말은 "단세교쇠, 만물흥행"이라는 표현이다. 중용의 덕성이란 천명으로서 우리의 본래적 모습이 끊임없이 획득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세교가 쇠퇴하여 중용이 흥행이 되고 있질 않고 있다는 세태에 관한 주희의 지적인 것이다. 닭에게 모이를 주면 닭은 어느 경우에도 과식을 하지 않는다. 또 약간의 서열 다툼은 있으나 결국 불급하는 자도 없이 다 골고루 먹는다. 닭은 반드시 중용을 지킨다. 먹이를 주면 물론 맛있는 것부터 먼저 골라먹지만, 다음에 쉬었다가 순차적으로 땡기는 대로 먹는다. 아무리 맛없는 것이라도 나중에 배고프면 남김없이 다 먹는다. 식도가 매우 질서정연한 것이다. 그런데 인간만이 많이 먹으려 하고 맛있는 것만 독차지하여 독식하려 하고, 자신이 파멸에 이를지언정 양보를 하지 않는다.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러한 욕심의 자기파멸자들에게 인간들은 오히려 경쟁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의 전형이라고 박수를 보내며 선망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때로 "짐승만도 못하다"는 표현으로 인간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언사를 발하지만, 실제로 인간은 삶의 기본조건에 있어서 대부분의 짐승(=중생의 옛말)에 못 미친다. 아주 사소한 예이지만, "과식"은 현대인의 공통된 질병이다. 과식으로 인한 비만은 통계학적으로 암보다 더 무서운 질병으로 간주되고 있다. 아프리카나 동남아에서 수많은 어린이가 기아에 허덕여도 미국인들은 비만을 개선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미국인들의 비만은 체형의 비만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미국이라는 문명의 비만과 상통하는 것이다. 불필요한 문명의 군살을 유지하기 위하여 과도한 군사력과 과도한 정치폭력, 과도한 금융조작을 통하여 비만적 공급을 계속하는 것이다.


한국도 이러한 미국의 문화패턴을 모방하기에 급급하다. 재미있는 이것은 한국의 어린이들이 대부분, 미국 어린아이들처럼 비만형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도저히 "한국종자"라는 느낌이 들 수 없는 서양형 체형이 부쩍 눈에 뛴다. 우리 속담에 "세살버릇 여든 간다"라는 명언이 있다. "과식"의 병폐는 바로 세살 전후의 부모교육에서 구조지워지는 것이다. 프로이드나 라캉이나 삐아제를 운운하기 전에, 더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어릴 때 올바른 식생활의 습관이 몸에 배도록 가르치는 소학의 훈육이다. 프로이드, 라캉, 삐아제 이들의 이론은 모두 어린 시절의 성격형성이나 인식과정에서 관념적 설명일 뿐이며, 성인의 뉴로시스 매카니즘을 소급적으로 적용한 오치된 개념의 오류일 수도 있다. 그것은 어린이들의 실천적 훈육의 행위에 관한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는데는 별로 도움이 되질 않는다. 어른들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킬지는 모르겠으나 정작 아이들은 리버랄리즘이라는 명목하에 충족시킬지는 모르겠으나 정작 아이들은 리버랄리즘이라는 명목하에 무책임하게 방치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주희의 "세교"가 쇠퇴하였다는 탄식의 의미가 있다. 그래서 도무지 중용이 흥행이 되질 않고 있는 것이다. 21세기에는 영화와 같은 엔터네인먼트를 흥행시켜야 할 것이 아니라 중용의 교육론을 흥행시켜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