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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지 있는 인문학

중용 제2장 2-1. 중니왈: "군자중용, 소인반중용.

제 2장 仲尼曰 : "君子中庸, 小人反中庸.

                   중니왈 : 군자중용, 소인반중용


沃案 : 제2장에서부터 "중용"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제1장에서는 "중"과 "화"를 말했으며 "중용"을 말하지는 않았다. 20세기의 많은 주석가들이 제1장과 제2장의 사상적 · 문헌적 단절을 지적하고 제2장부터 본래의 『중용』 본문이 시작된다고 말해왔지만 이제 그러한 천설은 억설이 되어 통하지 않게 되었다. 중과 화와 중용은 모두 내면적인 상통성이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다면 중 · 화에 관한 철학적 논설은 자사 본인의 발명임이 분명하고, 제2장부터는 그것은 유래나 근거를 할아버지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밝히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 재미있는 것은 "중니왈"이라는 말이 수를 장식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 재미있는 것은 "중니왈"이라는 말이 수를 장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 3장부터는 "자왈"로 일관하고 있지만, 자사의 시대에만 해도, "자왈"을 운운하는 학파가 이미 많이 생겨나서 "자왈"이 꼭 "공자왈"이라는 것을 보장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3장부터 나오는 "자왈"의 "자"가 "중니"를 가리킨다고 하는 그 역사성을 확인하기 위하여 여기 "중니왈"을 제일 먼저 내세운 것으로 보여진다. "중니"는 공자의 자이며, 그 엄마가 나이 많은 남편에게서 아들을 얻기가 힘들 것 같아 니구산에서 빌어서 공자를 낳았기 때문에 명을 구하라 하였고, 그 자를 중니라 한 것이다. 『혹문』에는 손자 자사가 할아버지를 자로서 호칭할 수 있냐고 누가 물으니까, 주희는 자사 당대의 주나라 예에는 자를 위하는 습관이 없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대답한다. 


할아버지 중니의 사상에는 아직 "중"에 대한 심성론적 탐구가 없었고 단지 "중용"에 대한 소박한 견해가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자사는 "중"에 대한 심성론적 · 우주론적 총체적 담론을 제1장에 밝혀놓고 그것의 근거로서 할아버지 중니의 "중용"사상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주목해야 할 텍스트의 사실은 제1장에서 "누구왈"이라는 언급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중용』전체를 통하여 "누구왈"이 없는 부분은 자사 자신의 생각의 표현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독창적인 테마를 먼저 웅장하게 쏟아놓고 그것과 관련된 본원적인 할아버지의 사상을 한가닥 한가닥 풀어나가기 위하여 "중니왈"에서 "자왈"로 진행해나가는 구성역은 마치 심포니를 구성해나가는 것과도 같은 치밀함을 과시하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 단어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군자"와 "소인"의 대비이다. 「이인」편에 나오는 "군자회덕, 소인회토; 군자회형, 소인회혜", "군자유어의, 소인유어리"과 같은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군자와 소인은 짝을 지어서 잘 나타나는 공자의 대비적 언어사용법에 속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인간에 대한 계급적 · 계층적 차별이나, 치자와 피치자의 정치권력의 양극성이나, 인간종자에 대한 질적 차별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군자와 소인을 정치제도적 틀 속에서의 치자와 피치자의 종속적 관계로 규정하려고 했던 소라이1666~1728의 입론은 근원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군자유의어, 소인유어리"의 경우에도 군자와 소인은 같은 깨달음의 차원에서 대비될 뿐이다. 즉 군자는 의에서 깨달음을 얻고 소인은 이에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다. 즉 깨달음의 층차의 단계적 고하를 말했을 뿐이다. 따라서 군자는 위대한 통치자이고 소인은 우매한 백성이라는 식의 논리는 유교에 없는 논리이고, 또 있어서도 아니 되는 논리이다. 군자와 소인은 결국 동일한 인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군자가 수양을 게을리하거나, 판단을 잘못하거나, 일시적 탐욕에 치우치거나, 처신을 잘못하면 곧바로 소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결국 군자나 소인이나 모두 "사"라는 일정한 수준의 교인인들을 놓고 하는 말이지, 성밖의 밭가는 농부를 보고 "소인"이라는 표현을 쓰는 법은 없다. 현재 21세기 우리의 언어사용례에 있어서도 "저 소인배 새끼"라는 욕은, 반드시 대학교수간에, 기자들간에, 정치인들간에, 정적들간에 서로 사용하는 말이지, 민중을 놓고 하는 말은 아니다. 소인이란 지식인을 격려하기 위한 반어적 정치일 뿐이다. 즉 군자와 소인을 대비시킬때는, 소인적 덕성을 양기하여 군자적 덕성을 지향케 만드는 교육적 의도가 숨어있다.


서양언어, 특히 서양종교에 세뇌된 언어의 용례 때문에 이러한 유교적 본래용법의 함의가 심하게 왜곡되고 있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구원하는 자와 구원받는 자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어떻게 신부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죄사함을 얻는단 말인가? 비밀만 지켜진다면 기분이 좀 경감되는 느낌은 있는지 모르겠으나 참으로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라 할 수밖에 ㅇ벗다. 어떻게 인간에게서 죄인과 죄사함의 주체가 분리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은 오직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중용』의 "자성"(스스로 이루어 나갈 수밖에 없고) "자도"(스스로 길지워 나갈 수밖에 없다)의 투철한 논리이다. 『중용』은이러한 논리를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다. 군자의 길과 소인의 길은 나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자기를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자에게는 오직 파멸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여기 소인의 "반중용"은 군자의 "중용"을 지향케 만든느 가혹한 논리라는 것을 우리는 자각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건드리지 않을 수 없는 큰 주제는 "중용"이라는 말의 뜻에 관한 담론일 것이다. "중용"의 용례는 『논어』에 단 한 번 나오는데, 그것조차 『중용』 제3장에 나오고 있다. 따라서 『논어』에서는 "중용"에 관하여 그다지 본격적 심도있는 언어적 분석은 진행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 뜻은 『중용』이라는 서물 전체의 료해에서 얻어지는 게슈탈트적 이해에 기반할 수밖에 없다. 


대강 "용"에는 "일상적"이라는 의미와 "항상성"이라는 의미가 겹쳐있다. 일상성이라는 의미는 『중용』을 20세기 실존철학의 선구로 만드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인간의 궁극적 과제상황은 항상 "일상"에 있다는 것이다. "일상"을 버리고 특례적, 초세간적, 초월적 삶은 존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천국"을 "하나님의 질서"로서 해석한다면 그것은 철저히 일상 속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그것은 자사의 신념이다. 그것은 자사보다 시기적으로도 한참 후배인 예수의 신념이기도 하다(약 5세기 늦게 태어났다): "당신의 나라이시여! 이 땅에 임하시옵소서. 당신의 뜻이 하늘에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그의 복음서적 이미지는 후대 교회의 종말론적 요청에 의하여 변형된 것이다(『도마복음』은 그러한 종말론적 요청에 의하여 변형되기 이전의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용"은 일상성이라는 의미와 함께 "항상성"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물론 "일상"처럼 "항상"스러운 것이 없다는 의미도 되겠지만, "항상성"이라는 뜻은 우리 일상의 실존의 저변에 깔려있는 어떤 본체적 지속성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하루하루 사는 삶은 가변적이고 변덕스럽고 무상할 수도 있지만 그 저변에는 어떤 지속적 항상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내가 본체로 말한다 해서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본체도 아니요, 또 현대어에 관한 엄밀한 언어적 성찰을 거치지 못한 일인학작들이나 동방학 학자들이 함부로 지껄이는 "불변성"의 대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불변"은 자사의 사전에는 없다. 3천년 이상의 유교사전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노자』 16장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대저 만물이 들풀처럼 쑥쑥 자라지만, 무도가 결국에는 각기 그 뿌리로 돌아갈 뿐이다.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고요함이라 일컫고, 또 이것을 일컬어 제 명으로 복귀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제 명으로 복귀함을 일컬어 항성이라 말하는 것이다.


항상성이라는 것은 근원으로의 복귀이며 결국 『중용』에서는 천명으로의 복귀라는 의미가 내포된다. 이 "천명"의 항상성을 장자의 「통서」에서 인용한 전목의 논의는 "중용"의 "용"의 일면을 잘 지적하고 있다: "대저 물이라고 하는 것은 근원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굄려된다든가 하는 분별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모두 동시에 진행되는 한 측면들일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다시 통하여 일이 된다. 오직 이러한 분별을 초월할 수 있는 달자만이 만물제동의 실제의 진상, 즉 모든 것이 다시 통하여 하나가 된다고 하는 것을 간파할 수 있다. 그는 시비호오의 분별적 초월할 수 있는 달자만이 만물제동의 실제의 진상, 즉 모든 것이 다시 통하여 하나가 된다고 하는 것을 간파할 수 있다. 그는 시비호오의 분별적 인식을 사용하지 않고 항상스러운 자연의 모습, 즉 용에 있는 그대로 둔다. 용이라 하는 것은 용이요, 용이라 하는 것은 통이요, 통이라 하는 것은 득이다. 득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자득하는 삶의 궁극적 도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용의 "용"의 의미에서 "일一," "용用," "통通," "득得"의 복합적 의미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은 천지만물의 근원성이요, "용"은 그 기능성이며 변화생성력이다. "통"은 일체조내의 상호교섭성을 의미한다. "득"은 존재의 조적적 향유의 완성이다. "용"에는 이러한 복합적 함의가 들어있다. 그리고 이것은 자사시대의 일반적 디스꾸르였다. 자사는 이러한 드스꾸르를 배경으로 "중용론"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주희장구 : "중용"이라는 것은 편벽되지 아니 하고 치우치지 아니 하여 지나침과 모자람이 없으니, 평상의 리라고 할 수 있다. 그것도 또한 천명의 당연한 바이며, 정일하고 은미함의 극치라 할수 있는 것이다. 오직 군자라야 이것을 체현해낼 수 있다. 소인은 이에 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