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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지 있는 인문학

중용 제1장 1-5. 치중화, 천지위언, 만물육언

1-5.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치중화, 천지위언, 만물육언


1-5. 중과 화를 지극한 경지에까지 밀고 나가면, 천과 지가 바르게 자리를 잡을 수 있고, 

      그 사이에 있는 만물이 잘 자라나게 된다.


㓇案 아주 간단한 명제 같지만 그 함의는 실로 엄청난 것이다. 『중용』사상의 가장 핵심적 논의를 여기에 담고 있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제4절의 논의에서는 "천하天下 All Under Heaven"라는 말을 썼는데 그것은 인간사회에 국한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천지"라는 말은 "천하"와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전 우주를 포섭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실제로 고대중국인들의 우주관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방대한 갤럭시들의 그러한 우주가 아니었으며, 그껏해야 지구중심적geocentric인 생태계ecological sphere를 벗어나지 않는다. 땅은 지구이며 하늘은 실제적 의미에 있어서 대기권을 형성하는 모든 조건의 총화라는 의미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이벤트를 만물이라 불렀고, 그 만물 중의 최귀자最貴者를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만물의 일부이며 만물은 천과 지가 없이는 그 존재기반이 전무하다. 따라서 여기 중화라는 개념은 인간의 심성적인 차원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천지론적인 코스몰로지의 중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천·지·인 삼재三才의 중中이 바로 사람이며, 이 사람의 행위에 따라 천과 지의 위도 영향을 받는다고 파악한 것이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이 천과 지의 위를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도가는 인위적 문명에 대하여 근원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문명을 창출하는 인간에게 이 우주의 운영권을 맡기지 않는다. 이 천지간에서 실제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매우 하찮은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이 우주에 대한 교만한 마음을 하루 속히 버리는 길만이 인간의 구원이요, 우주의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간의 언어까지 부정하는 래디컬한 인식론까지 제시한다. 그러나 유가는 그러한 도가적 입장은 인간과 우주에 대한 방치일 뿐이며 근원적으로 아무런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고 본다. 그만큼 유가는 인간이 만드는 문명의 강성함이 자연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에 대하여, 즉 천지에 대하여 책임을 지녀야 한다고 본다. 인간이 문명을 영위하는 것만큼 천지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본다. 즉 유가는 인간에게 우주경영권을 넘겨주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건방지고, 당돌한 논의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BC 5세기의 상황이 아닌 오늘날 21세기의 상황에서 보자면 인간의 문명은 지금 천지를 멸절시킬 수 있는 막강한 현실적 힘을 과시하고 있다. 어떻게 2500년 전에 이미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그 형안이 놀랍기만 하다. 여기 "천지위언天地位焉"이라는 말은 추상적·형이상학적·관념적 논의가 아니라, 매우 구체적·형이하학적·실천적 논의인 것이다. 인간의 행위가 하늘과 땅의 자리도 뒤바꿔놓을 수 있는 것이다.


천과 지는 고정된 물리적 실체로서 위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유형적(=지地)과 무형성(=천天)의 순환성 속에서 파악되는 기능적 위상을 지니고 있다. 천과 지는 반드시 순환구조를 지녀야 한다. 그 순환구조를 우리가 태극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태극상은 실제로 식물의 광합성을 통한 산소배출과 동물의 산소를 활용하는 호흡작용의 순환구조만 없어도 존재할 수가 없다. 물의 순환, 산소의 순환, 탄소의 순환이 광합성photosynthesis과 호흡respiration의 과정 속에서 서로 얽혀있는 것이다. 뭍에서 생물이 황성한 활동을 시작하기 이전에 이미 30억 년에 걸쳐 조류와 남색세균은 꾸준히 산소를 배출하여 오존층을 형성시켰다. 그러한 시기에 우리는 천지를 놀할 수 없고 태극상을 논할 수 없다. 기실 우리가 알고 있는 오늘날의 기후조건의 안정성은 불과 완신세 1만 년의 시간밖에는 경과하지 않았다. 지금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지각판들의 이동에 의한 지진이나 화산폭발 같은 것을 생각하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있는 땅이라는 것도 지구라는 모자이크에 끼워진 지각판들의 배열에 불과하다. 이 지각판들이 움직이면 모든 것이 재배치된다. 우니 문명도 오늘의 무습을 유지할 길이 없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의 모습이란 이 지각판들이 모처럼만에 안정성을 획득한 시기에 불어나 꼬무락거리고 있는 벌레 모습에 불과한 것이다. 과연 빙하기에 자사가 살았다면, 이런 웅혼하고 아름다운 천지의 철학을 논의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중용의 철학은 성기成己와 동시에 성물을 논한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론의 근저에 천지라는 매우 구체적인 생태론적 관심이 깔고 있다는 것이다. "천명지위성"이라 할 때의  "천"은 이미 생태론적인 가치를 지니는 존재의 근거라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물리적 자연, 이법적 자연, 심미적 자연, 윤리적 자연, 종교적 자연이 천이라는 개념 속에 통합될 수 있는 것이다. 근세 서구과학에서처럼 "천"이 가치가 배제된 "자인Sein"의 세계의 세계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연Nature"은 그 자체로 모든 가치, 즉 "졸렌Sollen"의 근원이다. 46억 년의 지구의 역사와 있어서 오늘날의 순환구조는 매우 기적적인 생태론적 가치체계라는 것이다. 근세의 모든 서양철학의 논의가 이러한 생태론적 관심을 배제했기 때문에 그 한계성을 쉽게 노출했다. 맑시즘의 최대의 약점도 인간세의 분배만을 생각했지 천지라는 생태적 가치를 인간의 노동이나 삶의 조건 속에 포함시키지 못했다는 데 있다. 오늘날의 모든 사회정의론, 그리고 인권의 문제도 천지론의 에콜로지가 배제된 상황에서 논의되고 있다는 데 있다. 나는 치중화하면 천지가 위언하고 만물이 육언한다는 이 메세지는 자사의 사상이 21세기 서구문명과 동아시아문명의 과제상황에 던지는 최대의 숙제라고 생각한다.


주희장구 : "치"는 극단에까지 밀고 간다는 의미이다. "위"라는 것은 그 있어야 할 자릴르 편안히 한다는 의미이다. "육"이라는 것은 그 삶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는 뜻이다. 계신하고 공구하고 공구하는 것으로부터 내면적으로 압축시켜 나가면 지정한 가운데 편벽되고 치우친 바가 없을 뿐 아니라 그 지킴이 흐트러지지 않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그 내면적 중이 지극하게 되어 천지가 바른 자리를 획득하게 된다. 신독하는 것으로부터 정밀하게 압축시켜 나가면 사물과 교감하는 자리에서 조금의 어긋남도 없게 될 뿐 아니라 어느 상황에서도 자연스럽게 오류가 없게 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그 화가 지극하게 되어 만물이 잘 자라나게 된다. 대저 천지만물이란 본시 나와 한몸을 이루는 것이다. 나의 마음이 바르게 되면 천지의 마음 또한 바르게 도니다. 나의 기가 순하게 되면 천지의 기 또한 순하기 된다. 그러므로 나의 내면적 수양의 경지는 그 효험이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학문의 최극상의 공능이며 성인의 능사인데, 이것은 애초로부터 인간내면의 문제이며 외부로부터의 지침을 필요로 하는 문제는 아니다. 제1장 전체를 통하여 성, 도, 교 삼자의 문제 중 오직 성·도만 집중적으로 말한 느낌을 주지만 실제로 "수도지교"의 문제는 항상 성과 도 속에 같이 있었던 것이다. 중을 체라고 하고, 화를 용이라고 한다면, 비록 동정의 차이는 있으나 반드시 체가 서고나서 용이 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니, 실로 이것은 두 개의 떨어지는 사태가 아니다. 그래서 자사께서는 최후로 중과 화를 함께 묶어 논의함으로써 제1장 전체의 뜻을 매듭지으신 것이다.


장구옥안 : 마지막 부분의 해석이 몹시 애매하다. 최대한 본의를 살려 의역하였다. "천지만물, 본오일체"라는 구문은 정명도의 말이다. 『혹문惑問』에 의하면 누군가 주희에게 이와 같이 물었다: "천지가 바르게 위하지 않고 만물이 제대로 육育하지 않는 재난의 상황에 실제로 성현이 나타나 중화만 치하면 그런 재난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주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아무리 대단한 성인라도 물리적인 재이지변의 상황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범위는 지극히 제약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 한 몸에라도 중화를 치하면 천하가 비록 어지러울지라도 그 나의 몸의 천지만물은 안태함을 얻을 것이다. 그 한 몸에 중화를 치하지 못하면 천하가 비록 다스려질지라도 내 몸의 천지만물은 괴착되고 말 것이다." 주희가 말하는 "내 몸의 천지만물"은 무엇인가 시사함이 깊다. 결국 문명이라는 것이 인간의 욕망과 관련된 것이고, 그 욕망과 관련된 것이고, 그 욕망을 절제할 수 있을 때 천지의 위를 바르게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주희의 논의는 관념적인 것만은 아니다. 단 한 사람의 욕망에 의하여 4대강이 다 파헤쳐지고 무용의 사업만 일삼아 국가적 재난이 초래되는 오늘의 현실에 조응하여 본다면 이러한 논의가 결코 관념적인 논의가 아니라는 것은 명료하다. 그리고 주희가 말하는 체용은 서양철학의 본체-현상에 정확하게 대응하지는 않는다.


주희가 나의 마음과 천지의 마음, 그리고 나의 기와 처닞의 기의 상감을 이야기한 것은 오늘날 함부로 운하를 파고 터널을 뚫고 바다를 막고 환경재해를 일으키는 현대인들이 회복해야 할 유기체철학Philosophy of Organism의 인식론이라 말해야 할 것이다. 나의 마음과 천지의 마음은 하나이며 항상 호상작용 하고 있다. 천지는 인간에게 있어서 영원한 배움의 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