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 제4장 4-1. 子曰:"道之不行也, 我知之矣, 知者過之, 愚者不及也; 道之不明也, 我知之矣, 賢者過之, 不肖者不及也. 자왈:도지불행야, 아지지의, 지자과지, 우자불급야; 도지불명야, 아지지의, 현자과지, 불초자불급야.
4-1.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 "도가 왜 행하여지고 있지 않은지, 나는 알고 있도다.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도를 넘어서서 치달려 가려고만 하고, 어리석은 자들은 마음이 천한 데로 쏠려 미치지 못한다. 도가 왜 이 세상을 밝게 만들지 못하고 있는지, 나는 알고 있도다. 현명한 자들은 분수를 넘어가기를 잘하고 불초한 자들은 아예 못미치고 만다.
옥안: 여기 문장은 "도"를 주제로 하여 완벽한 파라렐리즘을 유지하고 있다. 제1장에서 성性·도道·교敎를 말했지만 바로 뒤이어 "도야자, 불가수유리야. 가리, 비도야"라고 하여 "도"를 주제로 하였듯이, 여기서도 또다시 "도"를 주제로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희의 말대로 "도"는 실상 실천론적 맥락에서 보면 "중"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도"는 우리 삶의 도이며, 그 도는 과·불급이 없는 지혜로운 중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주어가 "도"가 되어 있으므로, 과·불급의 대상을 "중"으로 하여 해석하기는 곤란하다. "과"는 "도"를 지나치는 방식으로 행하는 것이요, "불급"은 "도"를 못미치는 방식으로 행하는 것이다. 인간의 도에 있어서의 과·불급의 경향성을 언급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중"이라는 주제를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지자"와 "현자"에 관하여 지행론적 논리를 편다든가(주희), "지-우"와 "현-불초"에 대하여 비교론적인 정도 차를 운운하는것(공영달의 소)은 모두 주석가의 과도한 의미부여의 병폐이다. 도의 "불행"과 "불명"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 수사학적인 변양일뿐이며 "지-우" "현-불초"도 유사한 항목에 관하여 다양한 표현을 빌린일 뿐이다. "도"가 세상에 행하여지지 않고 있고, 세상을 밝히지 못한 현실에 대한 개탄을 반복적으로 말한 것일 뿐이다.
"불명"의 "명"은 『대학』의 "명명덕"의 앞의 "명"(타동사)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다. "도지불행야, 아지지의"는 『논어』「미자」7에 비슷한 용례가 있다: "도가 행하여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우리도 잘 알고 있는 것이외다. 도지불행, 이이지의"자로와 은자와의 사이에 있었던 대화의 한 부분이다.
주희장구 : "지자"의 "지는 거성이다. "도"라는 것은 천리의 당연이니, "중"일 뿐이다. "지"와 "우" "현"과 "불초"의 "과" "불급"이라고 하는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품부받은 기가 다르기 때문에 그 중을 상실하는 데서 생겨나는 현상들이다. "지자"는 그 지식이 너무 지나치게 발달하여 도가 행하기에 너무 시시한 것이라고 깔보고, "우자"는 그 지식이 너무 매사에 못미쳐 어떻게 도를 행하여야 할지를 알지 못한다. 이래서 도가 항상 행하여지지 않는 것이다. "현자"는 지자와는 대조적으로 그 행동면에 있어서 너무 지나쳐서 도가 지식의 대상이 되기에 너무 시시한 것이라고 깔보고, "불초자"는 행동면에 있어서 너무 못미쳐서 어떻게 지식을 획득해야 할지를 근본적으로 구하지 아니 한다. 이래서 도가 항상 세상을 밝히지를 못하는 것이다.
장구옥안 : 주희가 "지자"를 "지"의 측면에서는 과하고 "행"의 측면에서 부족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현자"를 "행"의 측면에서는 과하고 "지"의 측면에서 부족한 사람으로 규정한 것은, 공영달의 소에 내재하는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한 장치로서 제시한 것이다. 공영달은 도지불행은 쉬운 사태이고 도지불명은 어려운 사태라고 간주한다. 그래서 도지불행을 말할 때는 지-우로 말했고, 도지불명을 말할 때는 더 극단적인 현-불처로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잡한 도식적 이해는 말장난에 불과한 것으로, 송학의 한계를 드러내는 조잡한 주석이다. 지·행의 문제와 지·현의 사이에 무슨 필연적 관계가 있겠는가!
4-2. 人莫不飮食也, 鮮能知味也."
인막불음식야, 선능지미야
옥안 : 『중용』문구 중에서 잘 회자되는 명언이다. 제4장의 액세트는 이 마지막 한마디에 있다. 주희가 주석을 제대로 했더라면 앞에서 지와 행을 운을 할 것이 아니라 여기 이 말씀에 공력을 들여었야 했을 것이다.
우선 "마시고 먹는다"는 것은 우리가 몸을 가지고 사는 한에 있어서 그 유기체의 존속을 위하여 필요로 하는 에너지의 공급으로서 필연적인 과정이며, 따라서 생리적은 행위인 동시에 인과적인 과학의 법칙의 프로세스로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생명체이며, 역동적 호미오스타시스의 체계이며, 자사가 말하는 "중용"의 발란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자사는 그 중용의 근원으로서의 성을 정으로써 말해왔으며, 정은 엄밀하게 개념적으로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감각적인 쾌·불쾌의 원초적 감정으로부터 시작하여 오성이나 이성의 작용을 포섭하는 고도의 판단력에 이르기까지의 매우 중층적인 것이다. 이러한 성정론에 있어서는 "맛"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목마를 때 물을 마시고, 배고풀 때 밥을 먹는 것은 원초적·생기적 쾌감을 준다. 그러나 이러한 쾌감을 여기서 "맛"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분명 "맛"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원초적 쾌감과는 질적으로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맛"을 어떤 도덕적 규범이 지향하는 합목적성에 종속된다고 보지 않는다. 예를 들면, 우리는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하여 "맛"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긴박한 사회 불의와 당면하고 있는 사람에게 "맛"이라는 한가한 푸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맛"은 우리의 상식적 인식체계 속에서의 도덕적 선과도 거리가 멀다. 또한 "맛"이라는 것은 "개념적"으로 규정될 수가 없는 것이다. "맛"은 궁극적으로 먹는 행위를 통하여 몸으로 느끼는 고도의 상징체계이며, 그 상징체계의 특성은 오성적 범주의 규정성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맛은 이성적으로 설명되기 힘들다.
그리고 맛은 기본적으로 주관적인 느낌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성적인 객관성의 보장이 힘들다. 그러나 그럼에도 맛은 누구에게도 공통된 질감으로서 구유되는 어떤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보편성은 논리적 보편성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느낌의 보편성이다. 이 느낌의 보편성은 기본적으로는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의 보편성에 뿌리박고 있을 것이다. 맹자는 말한다: "인간의 입이 그 맛에 있어서 즐김을 똑같이 함이 있다."
'사가지 있는 인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용 제6장 6-1(2).순기대자여! 순호문이호찰이언, 은악이양선, 집기양단, 용기중어민, 기사이위순호!" (0) | 2019.01.29 |
---|---|
중용 제 5장 5-1. 자왈:"도기불행의부!" (0) | 2019.01.28 |
중용 제3장 3-1. 자왈:"중용기지의호! 민양능급의!" (0) | 2019.01.26 |
중용 제2장 2-2. 군자중용야, 군자이시중; 소인지중용야, 소인이무기담야 (0) | 2019.01.25 |
중용 제2장 2-1. 중니왈: "군자중용, 소인반중용. (0) | 2019.0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