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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지 있는 인문학

중용 제2장 2-2. 군자중용야, 군자이시중; 소인지중용야, 소인이무기담야

중용 제2장 2-2 君子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

군자가 중용을 행함은 군자다옵게 때에 맞추어 중을 실현한다. 그러나 소인이 중용을 행함은 소인다웁게 기탄함이 없다.


옥안 : 여기 우선 "군자지중용"과 "소인지중용"이라는 텍스트에 관항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떻게 소인이 "중용"을 행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이미 지적한 바, 군자와 소인을 같은 차원에서 이해하지 않고 이원론적으로 분열시키는 데서 발생하는 오류적 질문에 불과하다. 이렇게 이원론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앞 문장에서 "소인반중용"이라는 말이 있으므로 여기서도 "소인지반중용야"가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반"이라는 글자가 "중용" 앞에 첨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위나라 왕숙본에는 이 구절이 "소인지반중용야"로 되어있다는 사실을 인용한다. 이 왕숙본 이야기는 당나라 육덕명의 『경전석문』에 실려있다. 주희도 이 왕숙본에 의거하여 그렇게 해석한다. 참으로 치졸한 발상이다. 왕숙본이 자사의 볼내 의도를 왜곡하여 질못 베껴놓은 것에 불과하다. 이렇나 문제에 관하여 진사이가 바른 지적을 하였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문장에다가 왕숙본처럼 반 자를 보태놓으면 전체 문장이 맛이 없어지고 맥이 풀린다. 더구나 그렇게 되면 앞머리의 두 구절은 필요없는 문장이 되고 만다." 매우 적확한 지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앞에서 이미 "소인반중용"을 말했으므로 뒤에서 "소인지중용야"를 말하는 그 여유로움은 군자와 소인의 이원론적 분별을 없애면서 우리의 경각심을 높여주는 탁월한 효과를 자아내고 있다. 


다음에 중용한 것은 이 "시중"이라는 개념이다. 유가철학뿐 아니라 선진철학의 대부분의 사상체계는 인간을 철저히 시간 속에서 파악한다. 시간을 떠난 존재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모든 관념적 상상조차도 시간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관념의 연속으로서 시간을 말하는 록크나, 직관의 형식으로서의 시간을 말하는 칸트가 추구하는 바와도 같은 시간에 대한 인식론적 탐구는 선진철학자들에게 그다지 중요한 이슈가 되지 않았다. 칸트는 근원적으로 시간을 감각경험에서 추상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단지 감각경험이 전제하는 것으로 본다. 그것은 직관의 근저에 있는 형식이다. 칸트의 시간은 객관적이거나 리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감각자료를 일정한 법칙에 따라 조합하는데 필요한 인간의 마음의 성격에서 유래하는 주관적 조건이다. 그러나 천지론적 우주론의 체계에 있어서는 천지 그 자체가 하나의 시공복합체이며 천지간에 태어나는 만물은 모두 하늘이 구현하는 시간성과 땅이 구현하는 공간성의 소산이기 때문에, 천지간에 존재하는 여하한 티끌조차도 시간의 지배를 떠날 수 없다. 그러니까 시간은 인간의 인식을 지배하는 하나의 직관형식이기에 앞서 모든 존재의 객관저깅고도 리얼한 그룬트Grund, 즉 기저라고 말할 수 있다. 칸트는 시간 속에서만 변화의 가능성을 생각 할 수 있으며 변화 속에서 시간을 생각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말 장난이다. 자사에게 있어서는 시간과 변화느 ㄴ등가이다.


서양인들은 근원적으로 시간을 물리학적으로 말할 때는 너무도 드라이하게 기하학적으로, 하나의 추상적 형식원리로서 말하고, 윤리적으로 말할 때는 너무도 공포스럽게 바라본다. 이것은 서양문명이 고래로부터 신화적 인식세계 속에서 시간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을 부정한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은 근본적으로 시간을 부정한 것이다. 이러한 비시간적 존재론이 중동문명의 구속사관적인 시간관과 묘하게 결합되면서, 시간은 저주와 초월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칸트도 영혼불멸을 실천이성의 지상적 과제로 설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철학에서는 시간은 어디까지나 생명적 시간이며 기하학적 공간의 메마른 절대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시공복합체로서 창조의 원천이다. 창조가 없이 시간을 생각할 수 없다. 중국인들에게 시간의 직선성과 순환성은 전혀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 「계사繫辭」에서 말하는 "생생," "일신," "부유," "성덕," 이런 말들이 시간을 대신하는 말들이다. "역易"이라는 것은 시간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시간은 지속의 직선적 배열이 아니라, 만물이 착종錯綜하는 얽힘의 관계일 뿐이므로 시간의 실제적 의미는 창조를 위한"때맞음" 즉 영어로 말하자면"timeliness"를 의미한다. 『주역』을 비롯한 선진문헌에 나오는 "시時"라는 말을 대강 일별해보면 그것은 대체로 "time"이나 "temporal"을 의미하기보다는 "timely" "timeliness"를 의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원시반종, 고지사생지설"이라는 말이 있듯이 시간이란 끊임없이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끊임없이 마지막을 되돌리는 우리의 인식을 통하여 착종되고 순환되는 것이다. "반종"이란, "종終"이 곧"시始"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생사의 굴레에 대한 집념에서 벗어나게 된다. 생사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생사의 바른 인식을 통하여 시간의 시종을 달관하는 것이다. 시간에는 본시 절대적 시도 없고 절대적 종도 없는 것이다. "중中"이란 이러한 시간적 존재의 앎의 방식의 가장 근원적인 양태이다. 따라서 그 "중"은 기하학적 미들middle이 될수 없으며, 어떻게 시공적 상항에 알맞게 그 중을 발현하느냐, 하는 "시중"의 문제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중" 그 자체가 "시"의 문제인 것이다.


"군자이시중"이라 할 때의 "이"라는 문법적 기능어는 여기서는 "그리고"를 의미하는 접속사가 아니라, "연"의 의미를 갖는, 상태를 나타내는 접미사이다. "돌연"을 "돌이"라고 표현해도 한문에서는 동일하다. 선진발음체계에서는 "연"과 "이"가 동음이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군자이" "소인이"는 "군자연" "소인연"으로 해석되어야 마땅하다. 많은 주석가들이 이러한 문법적 특성을 간과하고 있다.


"기탄"이란 거리낌과 두려움이 있는 것을 말한다. 시중을 아는 마음이란 인仁한 마음이다. 인仁한 마음은 서恕의 마음이며, 서의 마음이란 입장을 바꾸어 생각할 줄 아는 마음이다. 따라서 군자라면 반드시 타인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자연히 "거리낌"과 "두려움"이 생겨난다. 군자는 많은 사람의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리더십의 본질에는 "기탄"함이 있어야 한다. 사실 "거리낌"과 "두려움"이 모든 종교적 감정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오토Rudolf Otto, 1860~1937가 말하는 "미스테리움 트레멘둠mysterium tremendum"보다도 더 본질적인 것이다. 『중용』에서 말하는 모든 미스테리움은 반드시 일상의 체험 속에서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트레멘둠은 반드시 "기탄"의 거리에서 와야한다. 만인의 지도자라 하면서 그토록 무책임하게 새만금을 막아버리고, 4대종교의 지도자와 교단, 그리고 대부분의 시민단체와 의식있는 시민들이 다 반대를 함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강경하게, 일사불란하게 4대강정비사업을 밀어붙이는 "무기탄"의 정치행태를 바라보면서, 민주정치라는 것이 소인배의 리더십만 양산해내는 체제라는 반성이 심화죄지 않을 수 없다.


『순자』「불구」편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모든 인간의 재앙이라는 것은 결국 한편으로 치우쳐서 그 전체를 해치기 때문이다. 욕심날 만한 것을 바라보게 되면 한편으로만 치우쳐 그것이 싫게 될 것이라는 것은 전혀 생각치 못하고, 이로운 것을 바라보게 되면 한편으로만 치우쳐 그것이 나에게 해를 가져다주리라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움직이기만 하면 함정에 빠지기 마련이요, 하기만 하면 오욕을 뒤집어쓰게 되어 있다. 이것이야말로 한편에 치우쳐 전체를 망치고 마는 재앙이라고 할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리더들에게 정확하게 적용되는 말이다. 소인도 중용을 행하지 아니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들의 중용은 기탄함이 없는 것이다. 그냥 무댓뽀로 자기 개인의 편협한 생각을 밀어붙이기만 하면 된다는 아집이 그들이 생각하는 중용의 특징인 것이다. 이에 반하여 군자의 중용은 시중이다. 그래서 맹자가 공자를 가리켜 시를 구현한 성인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 때의 시는 시중을 의미한다.


주희장구: 왕숙본에 "소인지반중용야"라고 되어있는데, 정자도 또한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셨으므로 나 또한 그 설을 따른다. 0군자가 중용을 실천하게 되는 까닭은 군자다운 덕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요, 또한 그때의 상황상황에 따라 거기에 맞는 중을 구현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소인이 중용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게 되는 까닭은 소인 특유의 저열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요, 또한 기탄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대저 "중"이라고 하는 것은 고정된 체가 없으며 시에 따라 구현되는 것이니, 이것이 곧 평상의 리이다. 군자는 이 리가 나의 내면에 있다는 것을 알고 항상 보이지 않는 데서도 계신하고, 들리지 않는 데서도 공구하여 시에 맞게 행하지 아니 함이 없다. 소인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욕심을 방자하게 부리고 행동을 망녕되이 하여 기탄하는 바가 없는 것이다.



장구옥안 : 크게 해설할 바는 없으나, "중무정체中無定體"라 한 것은 매우 중요한 언급이다. "중"에는 어떤 일정한 고정된 실체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니, 그것이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본체론ontology으로 접근될 성질의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여기까지가 제2장이다. 여기서부터 열 개의 장은 모두 "중용"이라는 주체를 논하여 제1장의 사상을 부연하여 해석하고 있다. 장마다 문장이 서로 다 연속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내면적 뜻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제1장에서 말하는 "중화"의 "화"를 변화시켜 "용"이라고 말한 것에 관해서는 유작, 1053~1123의 해석이 정확한 뜻을 얻고 있다: "성정의 측면에서 말하게 되면 중화가 되고, 덕행의 측면에서 말하게 되면 중용이 된다." 그러므로 실제로 "중용"의 "중"은 제1장의 "중"과 "화"를 다 통섭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장구옥안 : 성정론의 이론적 측면에서 쓰이는 개념이 "중화"이고, 덕행론의 실천적 측면에서 쓰이는 개념이 "중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제1장에서 말하기를 "중"은 "도지체"이고, "화"는 "도지용"이라고 했다. 성정론이란 도의 체용르 다 말한 것이다. 성은 중이고 정은 화이다. 그러나 실상 실천적인 덕행론에서 말한 "중용"의 "중"도 "도지체" 만을 말한 것일 수가 없고 "도지체"와 "도지용"을 같이 말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도지용"의 측면이 없이는 실천론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중용"이라고 하지만 그 "중"에는 이미 도의 체용이 다 포섭되어 있는 체용을 강화시키는 일상성의 문제가 된다. 결과적으로 "중화"보다도 "중용"이 더 포괄적인 개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책 이름도 "중화"라 하지 않고 "중용"이라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