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命之謂性
천명지위성
과연 이것은 무슨 말인가? 이것을 우리말로 풀면 이와 같다. "천이 명하는 것, 그것을 일컬어 성이라 한다." 사실 가장 정직한 해석이란 이 풀이 이외로 아무 것도 할 말이 없다. 여기서 상을 놓고, 본체니 본성이니 리니 하는 따위의 외재적 규정성을 가지고 접근해 들어가는 것은 일종의 "사기"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 사기일까? 일차적으로 성에 대하여 규정하는 문장을 앞에 놓고, 대뜸 그 본래의 규정성 이외의 개념을 가지고 거기에 덮어쒸운다는 것은, 차돌을 앞에 놓고 금이라 우겨대는 것과 하등의 차이가 없다. 성은 무엇인가? 이 문장이 말하지 않는가? 그것은 천이 명하는 것이다. 성은 천이 명하는 것이라고 하는 그 자체의 규정성을 떠나 하뭅로 이야기해서는 아니 된다. 이 문장은 본시 "성, 천명야天命也"라 해도 되는 문장이다. 그런데 "천명"을 앞에 놓고 "지위를 도치시켜 가운데 끼워놓고 "성"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성"은 천이 명하는 것이라고 해놓더라도, 과연 "성"이 대상으로 하는 것이 무엇일까? 사람의 성일까? 나무의 성일까? 닭의 성일까? 돌의 성일까? 그것은 모른다! "천명지위성"이라는 말 속에는 이 질문에 명료하게 답할 수 있는 단서가 주어져있질 않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해볼 수 있다. 이 『중용』이라는 책은 돌이나 닭의 독서를 위하여 쓴 책은 아니니까, 역시 여기서 말하는 "성"은 사람의 성이 아닐까? 그러나 돌이 독서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돌의 성을 우리가 말하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 이 『중용』은 얼마든지 돌의 성에 관하여 이야기한 책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중용』이 말하는 성은 사람과 돌의 성을 무차별적으로 지칭한 것일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독자는 다짜고짜 당신 도올은 『중용』을 도가의 책으로 보고 계시오라고 질문할 것이다. 이러한 질문은 과거에는 매우 그럴듯하게 들렀다. "그럴듯하다"는 말은 매우 논리적 근거가 정연하게 들어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정당치 못하다. 자사의 시대에 이미, 우리가 지금 도가적 사유니 유가적 사유니 하고 규정하는 것들은 혼용된 하나였다. 이러한 혼용된 사유를 놓고 도가니 유가니 하는 후대의 규합개념organizing concepts을 들이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논의로부터 매우 중요한 하나의 사실을 천명할 수 있다. 이 『중용』은 매우 에포칼한 서물이다. "에포칼"하다는 말 속에는 공문 유가 인문사상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최초의, 획기적인 논설이라는 뜻이 들어있다. 서양철학사에서 근대사상의 에포크를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 나오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je pense donc je suis"라는 명제를 기점으로 해서 생각한다고 한다면, 여기에는 분명 생각의 주체로서의 "나", 인간인 나, 그러면서 동시에 개체적 인간이 전제되어 있질 않다는 사실이다. "성"은 분명 일차적으로 "인간의 성"을 대상으로 햇음이 분명하겠지만, 그 "성"이 궁극적으로 인간성에 국한된다는 규정성은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개체성이나 인간성의 특별성이 전제되어 있질 않은 것이다. 이 최초의 명제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왜 『중용』 제1장이 "천지위언, 만물육언"으로 끝나게 되는지를 이해할 길이 없어진다. 성에 대한 대상적 한정성은 여기 존재치 아니 한다. 단지 "천명"이 성을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성에 대한 논의는 뒤로 미루기로 하고, 그렇다면 성을 이해하기 위하여 "천명"을 분석해보자! "쳔명"은 "천이 명한다"는 주·술구조를 갖춘 하나의 온전한 문장이다. "명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주희의 주석대로 "명령한다"는 상식적 의미가 그 일차적인 뜻임에 분명하다. "명한다"는 것은 "명령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명령한다"는 뜻은 대체로 상명자가 있고 하복자가 있는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에게 명령하는 것일까? 여기 명령의 주체는 매우 명료하다. 여기 명령은 군대의 상관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천이 내리는 것이다. 천이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이란 무엇인가? 아니, 천이 누구인가? 하여틀 명령의 주체로서의 "천"에 대한 해석이 명료해지지 않는 한 이 문장은 료해될 길이 없다.
우리는 이미 20세기 초부터 중국역사에서 갑골문자라는 방대한 역사적 문헌을 확보하는 행운을 획득했다. 이 은허에서 발굴된 문헌은 대체적으로 지고의 신인 상제의 명령을 알아내어 그것을 대행하고자 은나라의 왕들이 복을 행한 기록의 소산이다. 인류학적으로 상고해보건대, 우리 인간이 언어를 개발하고 공동체적 삶을 영위하려 했을 때, 그 공동체에 질서를 부여하는 어떤 구심체를 갈망했을 것이다. 질서가 없이는 공동체에 질서를 부여하는 어떤 구심체를 갈망했을 것이다. 질서가 없이는 공동체는 지속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구심체로서 인간을 세워놓으면 매우 불안정하다. 인간은 죽기도하고 변덕스럽기도 하고, 또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 일도 많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을 넘어서는 어떤 추상적 존재를 세워놓는 것이 피차 편리하고 안전하고 지속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권위의 변동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추상적 권위의 상징체가 여러 가지 언어형태로 나타났을 것이며, 그것을 우리가 보통 총괄해서 "신"이라 부르는 것이다. 또 초월적 존재라는 의미에서 "하늘"이라고 부르기도 했을 것이다. "하늘"은 높고 보편적이며 "땅"이라는 공간에 대해 초월적인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은나라는 상제 중심사고가 매우 강한 문명국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주나라는 천명을 상제로부터 직접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상제의 대행자인 국왕이 천자(하늘의 아들)의 권위를 가지고 공동체의 확실한 구심점으로 등장했다. 따라서 상제의 인간화가 일단 이루어진 셈이다. 더구나 주나라는 인지의 발달과 인간세의 경험의 축적에 힘입어 역성혁명을 달성함으로써 출발한 왕조였기 때문에, 혁명의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둘 수바껭 없었다. "혁명"이란 다름아닌 "천명"을 갈아버린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세상의 주재자가 상제라는 인격신이 아니라 상제로부터 받은 천명이며, 천명은 결국 인문적인 왕국의 공동운영의 질서의 권위를 의미했다. 주나라의 천자는 반드시 그 공동체에 건전한 질서를 부여하는 목적을 구현할 때만이 천명을 보전하는 것이다. 그러지 못할 때는 천명은 상실되고 만다. 따라서 천명은 하늘의 소리라기보다는 공동체의 평화와 번영을 요구하는 공동체구성원들의 근원적 요청이 결집된 소리였다. 하늘의 소리는 곧 사람의 소리요, 백성의 소리요, 민중의 소리였다. 따라서 왕은 민중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잠나이 왕으로서의 자격이 있다. 그렇지 아니하면 그는 천자 즉 하늘의 아들이 아니다. 혁명의 대상이 되고마는 것이다.
결국 천의 이눈화과정이 중국고대사상의 발전경로라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갑골문의 세계는 히브리민족의 『구약』의 세계와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히브리민족은 『구약』에서 머물렀다. 즉 그들의 종족신과의 계약을 변질시킬 수가 없었다. 왜냐?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그들의 종족신과의 계약상태가 유지되어야만 하는 정치적 환경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히브리민족은 소수 민족이었다. 다윗부터 왕조를 이루었다고는 하나 그 뒤로도 계속 분열되었고, 12지파간에 갈등이 심했으며, 안정적인 통일 대제국을 형성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따라서 항상 타민족과의 적대적 환경 속에서 전투적으로 살아야만 했다. 유대인들의 유일신관은 이런 전통적 환경 속에서의 생존전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 왕조는 정교한 봉건제를 토대로 중원을 통일하였기 때문에 협애한 유일신관에 매달리기보다는 인문적 질서에 의하여 그들의 제국을 통치하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이고 지속적이라는 예지를 깨달았다. 초월자에 대한 신앙보다는 예·악·형·정의 아름다움에 대한 신앙이 깊어갔다. 그들의 사회질서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천명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천명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고마움을 그들은 제례로 표현하고 노래로 예찬했다. 이 노래야말로 천명의 징표였다. 그래서 공자는 그토록 노래는 수집하는 데 평생을 헌신하였던 것이다. 『논어』「헌문」37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공자의 찬탄을 한번 되새겨보자!
子曰 : "莫我知也夫!" 子貢曰 : "何爲其知子也?" 子曰 : "不怨天, 不尤人, 不學而上達. 知我者, 其天乎!"
자왈 : "막아지야부!" 자공왈 : "하위기지자야?" 자왈 : "부원천, 부우인, 불학이상달. 지아자, 기천호!"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구나!" 이에 자공이 여쭈었다 : "어찌하여 선생님을 알아주는 이가 없는 것이오니이까?"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나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노라. 나는 사람을 탓하지 아니 하노라! 나는 비천한 데서 배워, 지고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노라. 이 나를 아는 이는 저 천이실 것이로다!
나는 이 공자의 독백이야말로 공자의 삶의 프로세스의 철저성을 과시하고 있다. 하늘을 원망치 않고 사람을 탓하지 않느며 오로지 하학에만 힘써 상달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는 공자의 독백은 민주세기에 사는 21세기적 인간에게 있어서도 더 이상 고백할 것이 없는 지성의 삶의 자세이다. 그것은 종교나 신화나 환상이 배제된 매우 합리적인 삶의 진정성이다. 그러나 진정성의 최후에 그는 그를 초월하는 절대적 존재로서의 "천"이라는 타자 the Other를 말하고 있다. 이 치열한 나의 인문적 삶을 알아줄 이는 인간이 아니라 저 하늘, 저 하느님일 것이다! 여기 공자의 느낌과 사유의 파라독스와 중층성이 있다. 자기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각은 철저히 인문적이지만, 그 총체적 평가에 대한 초월적 시선은 천에게 맡기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천"은 분명 은대의 후예로 자처한 공자의 의식 속에 아직도 자리잡고 있는 초월자의 머나먼 추억이다. 바로 자사는 이러한 공자 할아버지의 "천"을 물려받았다. "천이 명한다," 과연 그 천은 무엇을 명령하는 것일까?
천의 역사는 초월적 인격적 주재자의 이미지로부터 시작하여, 지상의 최고의 권력자로, 그리고 천명을 담지하는 백성의 소리로, 그리고 개별적 인간의 도덕적 주체성의 근원으로서 천이 논의되고 있는 것이다. 헤브라이즘이 머문 자리에 서구적 인류는 아직도 머물고 있다. 야훼가 인격성을 포기하고 인간의 성 내면으로 완벽하게 진입한다는 것은 서구적 전통 속에서는 아직도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중국고대에서는 이러한 진입이 이미 공자시대에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자사의 시대에 일어난 또 하나의 혁명적 변화는 천이 인격적 존재자의 뿌리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천지"라는 코스몰로지의 이법으로서 자연화되었다는 것이다. 『논어』에는 "천"과 "지"가 각각 별도로 나오기는 하지만 "천지"가 하나의 짝을 이루는 유기적 개념으로서 사용되는 용례가 없다. "천지"는 천과 지가 하나의 순환구조로서 엮어지는 자연과학적 유기체적 세계관을 전제하지 아니 하면 생겨나기 어려운 개념이다. "천지"는 그 나름대로 유니크한 체계를 형성하는 코스몰로지의 한 형태이다. "천지"라는 개념이 생겨나게 되면, 이미 그것의 추상화는 곧 "음양'의 탄생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중용』의 "천"은 "천지"의 생략형일 수가 있다. 이와 같이 『중용』의 "천"이라는 개념 속에는 주재적·자연적·의리적·도덕적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중추적 의미구조 속에서 규정되는 "천"이 "명령한다"고 할 때, 우리는 그 명령한다는 의미를 다시 한 번 깊게 새겨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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