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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아! 미안하다!! 지랄해서

나도 무릎 구부러지는 미미인형 갖고 싶다고

82년생 김지영이 영화까지 흥행을 하면서 

돈벌이를 할 때 난 속으로 외쳤다

니가 82년생이면 난 격동의 81년생이다!!

한해 하루가 중요한 한국에서의 호구조사 정신은

이럴때 발휘되나보다.

 

강원도 원주.

난 이 깡시골에서 살면서도 이상하게 무슨 자신감인지

내가 시골공주인줄 알았다.

'곧 나를 구출해줄 궁에서 사신들이 도착하리라

그것도 아니면 안드로메다(아는 행성이라고는 여기밖에 없었던지라...) 말머리 성운에서

우리엄마가 나를 데리러 언젠간 올테니

그때까지 이 인간종족들이 나를 구박해도 밥잘먹고 버텨야지'

이딴 근거없는 권익숙 외계인설을 만들며 

하루하루 버텨나갔다.

이렇게 버티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목소리 크고

동네에서 욕을 제일 잘하시는 우리 할머니 박분남여사 덕이었다.

항상 나의 이름은 권씨가 아닌 기씨, 요씨였다.

'기지배가 왜 이렇게 목통가지가 커!' '요년~~~!!'

그래서 나는 기억도 하지 못하는 나의 12살때의 친구들의 증언을 

듣자면, 내 말투 어조사와 말미는 항상 '기지배'였더랬다.

지금에서라도 이런 나와 친구를 해줘서 너무나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다시 나의 6살, 7살 시절로 돌아가면

3살 많은 집안의 장남!! 우리 오빠와 매일같이 비교와 차별을 받으면 살았다.

밥상을 놓을 때면 밥상을 들어 나르는 것은 엄마와 나였고

매끼 12첩 반상을 차려 여섯 식구를 먹여 살리는 엄마의 시다(보조)는 

나였다.

숟가락, 젓가락을 짝을 맞춰 보스와 짬 안되는 나의 자리를 적절히 

간격을 두고 반찬도 날라 동선을 고려하고 입맛을 고려해 위치를 잡아

놓아야 했으며, 밥을 다 먹고 나면 그릇을 다시 날라 개수대에 옮겨 놓기까지...

그렇게 6살까지 식모아닌 식모살이를 하다 7살때 드디어 해방이 되어

유아원이라는 곳을 다녔다.

난 오빠가 6살때부터 다닌 멀기도 먼 유아원을 오빠와 함께 7시반이면 차를 타고 집을 떠났다.

엄마는 매일같이 구박을 받는 할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 내가 유아원에 떠나는것이 

오히려 속이 편했으리라...

 

6살때까지 유일한 친구는 당시 500원이나 하는 미미인형이었다.

세상을 모르던 나는 팔다리라고는 애국자가 만드셨는지,

팔은 만세와 요기다니엘만 할 수 있을것 같은

360도 대퇴부 관절돌리기만 가능한,

그 외 관절이라고는 없는 365일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고

사대주의적인 금발머리를 한 전형적인 미미인형 단 하나였다.

교육은 인성교육이 다이고, 문자는 학교를 가서 배우면 되는 것이라 여긴

집안 어른들의 무관심인지 관심을 갖고 싶은 엄마의 혼을 빼서

교육을 막아버린 노친내들의 의도적인 교육 방해였는지

아이큐 145, 122인 우리 남매는 학교에 들어가기전까지 

글자를 몰랐다...

그러나 오빠는 달랐다.

4학년때까지 추억의 만화 챔프, 보물섬 등 당시 어린이들을 위한 만화 주간지, 월간지가 있었는데

우리집에는 그 책들이 쌓이고 쌓여 아버지 차인 쥐색 포니뒤좌석과 트렁크를 가득 매우고도 남는 책들이 있었고,

입학전까지는 일명 쌀자루라 불리우는 80kg 복숭아색에 핑크 두줄이 양쪽으로 그려진 포대로 

두개나 되는 장난감이 넘쳐 났다.

그러나 나에게는 요기다니엘씨 사촌이 만든 미미가 유일한 친구이자 장난감이었다.

택지개발이 한창인 황무지에 달랑 집 두채 있는 동네에서 친구도 없고

유일한 친구 미미와 난 하루종일 소통을 했다.

고추도 하나 달고 나오지 못한 기지배였지만

난 인형 하나에 감사해야 했고 그나마 장난감도 없는 친구들과 비교를 당했다.

집에는 쌀자루가 넘쳐도 만지지도 못하게 하는 오빠의 장난감이 있었지만

난 그냥 당당했다.

 

하지만

어느날... 사촌언니의 미미인형을 알게되었다.

구체관절이 들어있어 무릎을 교양있게 구부리고 의자에 앉힐 수도 있고,

엘보~가 구부러져 차마시는 시늉도 할 수 있었다...

헉!!! 그리고 구부러지는 이 신기방기한 미미는 내가 가진 뻣뻣한 미미와는

피부결조차도 달랐다.

뭐지?

이 촉촉하고도 묘한 느낌은?

 

그 시절 글자를 조금 알게 되었다.

더는 까막눈으로 사는 것을 지켜만 볼 수 없었던 아버지의 결단이 있었다.

아버지 일터에 책판매원이 홍보를 하는 덕에 우리집에는 전집이라는 창작 동화가 들어오게 되었고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키다리 선생님'이라는 책을 아는 글자를 조금씩 그림과 섞에 해석해 가며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개화기 여성의 권리에 눈뜨고 일제히 한복치마를 벗어던지고 바지를 입거나,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들마냥

 

난 미미와의 이별을 선언했다.

보란듯이 할머니가 내놓은 대문 앞 바케스라고 불리우는 휴지통에

미미를 던져버렸다.

박분남씨는 이 광경을 보고는 

역시나 동네 욕쟁이 할머니로서의 면모를 멋지게 드러내며

엄청난 목청을 드러내며 욕드립이 시작되었다.

"이년이~ 장난감이 넘쳐나니 멀쩡한걸 버리구 앉았네 으이그~ 장난감을 사주지 말아야지~"

하지만 이런 내 모습에 우리 엄마는 혼을 내기는 커녕

아무말도 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미미를 떠나보내고

난 솔로로 거듭났다.

박분남씨! 500원짜리 미미 따위는 나와 어울리지 않아!

쌀자루를 채우지 못하느니

차라리 없는게 낫지!

난 당당한 7살이다!!